ETC2018. 11. 6. 10:37




원글 주소 : https://www.dogdrip.net/121475957


1. 분석 불가능하다 - 이론

6분의 1 주사위 게임을 한다고 쳐. 첫 번 째 주사위 게임에서 4라는 숫자가 나왔다면
다음 두 번 째 주사위 게임에서 4라는 숫자가 나올 확률은 6분의 1보다 더 높아질까?
아니야. 확률은 여전히 6개의 숫자 모두 각각 6분의 1이야. 선행 사건이 후행 사건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지. 로또 분석을 보면 모두 과거 1등 당첨 번호를 근거로 
해서 분석을 하는데 도대체 과거에 1등 당첨번호랑 이번주에 나올 번호랑 무슨 상관이 
있냐는 거냐 이거지. 차라리 미신적 주술로 미래의 번호를 예측한다 그러면 그건 애초에 
과학적 근거가 없으니까 이 쪽에서 대응하지도 않겠으나 과거 1등 당첨 번호로 분석을
한다는 사람들은 그것이 과학적 근거가 있는 것처럼 “우리 업체만의 컴퓨터 시스템으로
과학적으로 분석을 했다“라고 말을 하니 반대쪽 입장에선 말이 안되는 소리라고 말하는거지.

왜냐면 모든 로또 회차는 독립시행 이니까. 저번주에 10이 나왔다고 이번주에 10이
나올 확률이 높아지는 게 아니고, 역시 역대 최고 많이 나온 번호가 20이라고 이번주에
20이 나올 확률이 높아지는 게 아니라는 거지. 그래서 저 사람들은 분석할 ‘정보’가 없는데
어떻게 분석을 하냐?라는 것이고, 분석이 가능하다는 사람들은 과거 로또 1등 당첨 번호가
분석할 ‘정보’의 역할을 충분히 한다고 말하는 것이고. 이 차이야.

뭐.. 데이터 분석 방법엔 여러 가지가 있지. 많이 나온 번호가 또 나온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고, 추첨을 많이 하면 할수록 결국은 당첨 번호 추출 빈도는 평균으로 돌아간다고
오히려 많이 나오지 않은 것이 이번에 나온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고.. 온갖 분석 방법이
다 있더라고. 하지만 반대쪽에선 저것은 기본 가정에서부터 오류라고 말하는 것이고.

분석 불가능하다 이론
끝.

 

 




2. 꾸준히 소액으로 해도 안된다 - 이론

6분의 1 주사위 게임으로 생각해보자.

추첨은 총 6번(6회차). 참가 기회는 회차별로 딱 1게임씩 매주 도전.


(직접 해보시기 바람)
1회차 때 1천원내고 6개의 번호 중 1게임 찍고 참가. 추첨.
2회차 때 1천원내고 6개의 번호 중 1게임 찍고 참가. 추첨.
3회차..
4회차..,
5회차..
6회차..

고작 6분의 1 주사위 게임, 
6주 연속 매주 했는데도 당첨 보장이 안됨.


800만분의 1 주사위 게임 800만주 한다고 당첨 되겠냐? 
라는 이론.

(여기서 만원치 사면 80만주로 줄어든다고 반박 리플이 꼭 등장하는데
그러면 “80만주 한다고는 당첨 되겠냐?”라고 재반론이 꼭 등장함.)

꾸준히 소액으로 해도 안된다 이론
끝.





3. 많이 사면 장땡이다 - 이론

1등 당첨자 16명이 나온 노원구 스파 매주 판매량 4만게임~8만게임 (4천만원~8천만원)


1등 당첨 확률이 간단히 800만분의 1이라 했을 때,
1만원치 사면 80만분의 1로 줄어들고,

10만원치 사면 8만분의 1로 줄어들고, 80만원치 사면 1만분의 1로 줄어들고(확률 0.01%)

100만원치 사면 8천분의 1로 줄어들고, 800만원치 사면 1천분의 1로 줄어들고(확률 0.1%)

1000만원치 사면 800분의 1로 줄어듬. 8000만원치 사면 100분의 1로 줄어듬(확률 1%)


대부분의 사람들이 1만원치 80만분의 1 확률 게임을 즐기고 있을 때

노원구 스파 사장은 매주 100분의 1 확률 게임을 즐기고 있음.
번호 100개 달린 주사위 던지기 게임 하고 있다는 것.

인터넷 로또 사이트는 매주 80만게임(8억치) 분량의 로또 랜덤 번호를 뿌린다는 추측이 있음.

8억치를 산다면 확률은 10분의 1로 줄어듬(확률 10%)

인터넷 로또 회사는 매주 번호 10개 달린 주사위 던지기 게임 하고 있음.

많이 사면 장땡이다 이론

끝.

 





4, 아날로그 기계로 추첨하니 분석 가능하다 - 이론

사실 로또 1등 당첨 번호가 가장 정확하게 랜덤으로 뽑힐려면
디지털 기계로 추첨을 해야 돼.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뭔가 눈으로
확인 되는 것을 원하기 때문에 이 시대에도 로또 1등 추첨은 아날로그 기계로
하고 있는데 이것 때문에 당첨 번호 분석이 가능하다는 이론이야.

왜냐? 카오스 이론이란게 있거든. 그것이 혼돈이나 무질서처럼 보이더라도
사실은 규칙성이나 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 규칙성이나 질서를 찾아낸다면
당첨번호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지. 카오스 이론의 대전제는 혼돈과 무질서인데 
로또 1등 당첨 기계 속 동그란 통.. 그 안이 진정 무질서의 대명사라 할 수 있겠지. 
랜덤으로 바람이 계속 불고 랜덤으로 빨려 들어가고.. 하지만 분석하는 사람들은 분명 
저 기계속에도 규칙이  있다고 믿고 분석하는 거야.

이와 관련되서 가장 대표적 사례는
가장 유명한 4~7회차 때 40, 42 4주 연속 고정 수 출현 사건인데
당시 내가 가입한 폐쇄형 로또 카페에 어떤 분이 4회차 5회차에 2주 연속으로
40, 42가 나오는 것을 보고 “이건 분명 무규칙 속에 규칙이 이뤄지고 있다. 
이 현상이 언제 바뀔지 모르겠으나 단기간 내에는 분명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글을 남기고 6회차 때 40, 42를 기본수로 해서 대출 받아서 랜덤으로 1000만원치를 
샀던 분이 있었어. 도박으로 치면 기회다! 라고 생각하고 올인 한거지. 
카페 사람들 모두 수학적 근거를 들먹이며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그랬었는데.. 

결과는? 6회차 때 또 40, 42가 나왔다는 거지. 
그리고 그 사람은 다음 카페를 탈퇴해버렸어. 
(당시 6회차 1등 당첨금 세전 65억, 2등 당첨금 세전 1억 9천만원)
당시만 해도 1등 되면 조폭이 찾아가서 칼로 협박한다 뭐 그런 소문이 있던 때라
똥줄 많이 탄 듯 함.

참고로
로또 4회차 1등 당첨 번호
14, 27, 30, 31, 4042 +2
로또 5회차
16, 24, 29, 40, 41, 42 +3
로또 6회차
14, 15, 26, 27, 4042 +34
로또 7회차
2, 9, 16, 25, 26, 40 + 42


아날로그 & 카오스 이론
끝.





5. JMJ 이론 (JACKPOT MAN is JACKPOT)

원래부터 이론은 존재하고 있었으나 JMJ라고 명명된 것은 최근임.
2011년 야구팀 LG트윈스가 시즌 초중반 내내 4강권에 들다가 결국 5위 밑으로 
떨어지자 LG팬들이 DTD이론을 주장. (네이버에서 DTD로 검색 요망)
DOWN TEAM is DOWN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의 약자

그러자 로또 카페에서 JMJ 명칭이 등장했는데
JACKPOT MAN is JACKPOT (될 놈은 된다)의 약자


이와 관련해서 가장 대표적 사례는
136회차 1등 당첨자. 
지명수배 상태에서 경남 마산시 월영동 훼미리마트월영마을점에서
1만원짜리 돈을 천원짜리 잔돈으로 바꾸기 위해 1만원을 건내고
로또 1천원치 구입.

그것이 1등에 당첨.. (당첨금 세전 19억 9천만원)

이후 로또 카페에는 로또 1등 당첨은 인간의 선행, 악행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간절함도 절실함도 기도도 전혀 쓸데없는 짓이며
구매 금액도 1등 당첨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JMJ 가설이 등장함.


그의 인생 스토리는 아래 기사 참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0&aid=0001992807

또 다른 사례로,
327회차 1등 당첨자.
같은 번호로 5게임 몰빵.
1등 당첨. (327회차 1등 당첨금 세전 8억8천, 5게임 몰빵 당첨됐으니 곱하기 5 -> 44억)

5게임 중복 당첨 후 바로 뜬 기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8&aid=0002000007

뉴스 발표 후 '타임머신 타고 미래에서 온 사람이다'라는 세간의 추측.
실제 DC 물리학도들도 단순히 운이 아닌 뭔가를 알고 미래에서 온 사람이 아닌가 비상한 관심을 보임.

그러나 그의 당첨금 수령 후 인터뷰에서, 
"왜 5개 같은 번호를 한번에 찍었느냐"라는 질문에 

당첨자 曰
 
"가끔 그렇게 하곤 한다. 
특별한 꿈을 꾼 것은 아니며 
번호도 별달리 연구하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썼다"

라고 말해 
코끼리가 7마리 튀어 나와서 자기를 밟고 갔다느니 
똥을 싸고 변기 물을 내리니 변기통이 막히더니 금덩어리 물들이 역행했다느니
온갖 희한한 꿈을 다 꾸고도 5등도 안되는 로또인들을 허무하게 만듬

물론 하루 몇시간씩 투자해가며 온갖 과학적, 수학적, 주술적인 방식으로
분석해서 감히 도박이 아닌 투자(!)를 하고 있다 말하는 자칭 '로또 전문가'들도 
(물론 당연히 그들은 로또 6등 분석 전문가들임 - 제외수 제공)
인터뷰를 보고 허탈함에 잠을 못이룸.

당첨금 수령 후 인터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73&aid=0001987594

이처럼 단 1천원치 하나의 번호만으로도 당첨이 되는 사례가 등장하자
JMJ 가설은 크게 힘을 얻어 현재 로또 당첨이론 중 가장 큰 지지를 받으며
다수설을 이루게 됨.

이에 'JMJ닥자천클럽'이라는 카페 내 소규모 세력도 등장.
뜻풀이를 하자면,
JMJ닥자천 -> 될놈은된다닥치고자동천원

추가하여,

2011년 7월 연금복권 2회차에서도 JMJ 사례 등장.


평소 복권을 사서 재미삼아 남에게 선물한다는 서울 40대 A씨.

연금복권 2회차 10장(1만원)을 같은조 연속된 번호로 산 뒤

지인들에게 술자리에서 각각 1장씩 총 9장을 남들에게 다 나눠주고

자신의 몫 1장만 남겨뒀다고 함.


그러나 아뿔싸, 지갑을 잃어버렸고.

분실 지갑을 찾기 위해 며칠을 백방으로 뛰어 다니다가

마침내 술자리가 있었던 식당에서 지갑을 되찾음.


다행히 식당 주인은 지갑 속 연금복권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A씨는 그 복권을 조회해보니 1등에 당첨!


딱 1장,

딱 1장의 그 복권이

20년간 매월 실수령으로 390만원씩 받게 해주는 1등 용지!


관련기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79&aid=0002270246


JMJ이론
끝.





6.1-2-3-4-5-6 이론


지금까지 로또 1등 당첨 번호 중 1-2-3-4-5-6은 나온 적이 없다는 이론.
즉, 극단적인 조합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
어차피 1-2-3-4-5-6은 800만분의 1 리스트 중에 있는 하나의 조합일 뿐이고 
지금 로또 추첨은 800만개의 수많은 번호 조합 중에 고작 400몇개의 1등 조합밖에 
나오지 않았으므로 "1-2-3-4-5-6은 왜 1등 번호로 안나오죠?"라는 물음은 곧 
"내가 찍은 숫자는 왜 안나오죠?"랑 같은 이야기 아니냐.. 라는 반론)

반론자들의 이야기가 수학적으론 타당한 이야기지만
1-2-3-4-5-6 이론을 설파하는 사람들의 핵심적인 주장은
극단적인 번호 조합이 '잘'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잘.

그러니까 그 '잘' 나오지 않는 그 날만 피해서 투자하면
훨씬 적은 돈으로 1등 확률을 높일 수 있다는 이론이다.


대표적으로,

6연번은 잘 안나온다, (30-31-32-33-34-35-36 등)
6번호 연속 행렬 조합은 잘 안나온다, (6-12-18-24-30-36, 5-10-15-20-25-30 등)
특정 번호대에서만 6번호가 모두 나오는 조합은 잘 안나온다, (21-23-24-27-28-29 등)
첫수가 30 이상인 경우는 잘 안나온다 (30-32-34-35-39-41 등)
끝수가 15 이하인 경우는 잘 안나온다 (1-3-4-9-12-14 등)
6개의 모든 번호가 홀수이거나 짝수인 경우는 잘 안나온다 (3-13-17-21-35-39 등)


이 이론을 주야장천 계속 주장한 사람은 내가 가입한 폐쇄형 카페의
'photoSynthesis'라는 닉네임을 가지신 분인데 명문대 컴퓨터공학과 출신 답게
1-2-3-4-5-6 이론을 근거로 하여 극단적인 번호를 모두 제외하고
평균적인 모든 조합수를 만드는 프로그램을 독자 개발하여 남과 절대 공유 안하고
자기 혼자만(!) 쓰고 있다.

저 프로그램의 특징은, 
1-2-3-4-5-6 이나 아니면 모든 번호가 홀수인 번호 조합 등의 
극단적인 번호를 제외시키고 평균적인 모든 조합을 제공해주는 프로그램인데
옵션에 따라 약 1천만원~8천만원 정도만으로 평균적인 조합을 다 살 수 있다고 한다.

쉽게 말해, 1등 확률이 800만분의 1이라 했을 때 
1등 당첨 확률이 100%가 되려면 80억치를 사야 한다. 
그런데 그 80억치의 조합엔 1-2-3-4-5-6도 있고 23-24-25-26-27-28 의 조합도 있다.


그런데 프로그램을 이용해 그런 조합들을 모조리 다 빼면 80억치를 사지 않고
1천만원치~8천만원치 정도로 100%에 가까운 확률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photoSynthesis님의 주장이다.

그 어떤 번호이든 확률은 다 똑같지만(수학적 확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님)
카오스 이론을 근거로 하여 '잘' 나오지 않는 조합들을 제외해서 구매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론이 크게 화제가 됐던 것은 최근의 일인데
(사실 이 1-2-3-4-5-6 이론도 그 분의 동의를 얻어야 했기에 뒤늦게 업데이트 한다)
photoSynthesis님이 "만물의 기운이 모두 나에게 쏠린다. 드디어 때가 왔다"면서 
2011년 7월 29일 모아둔 현금 729만원을 몰빵하겠다고 선언한 729선언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7월 30일 452회차 로또 1등 당첨번호가 추출 되었고

놀랍게도 452회차 로또 1등 당첨 번호는
8, 10, 18, 30, 32, 34 (6개 번호 모두 All 짝수)가 나왔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하필 올인하여 베팅한 그 회차에
기대 영역 바깥에 존재하는 극단값이 등장한 것이다.

안되는 사람은 이렇게도 안되는구나 싶은.. -_- (죄송합니다)

1-2-3-4-5-6이론.
끝.






7. 화성인바이러스 박삼수씨 이론


로또 1등 당첨자 최초로 TV에 얼굴을 공개하고(2009년 6월 2일 화성인바이러스 10회)
본인의 비법을 전국적으로 공개하신 
박삼수씨의 로또 분석 이론이다.


(1) 일, 월, 화, 수, 목, 금, 토 매일 5게임 이상,

한번 구입시 한 용지에 5천원 Full로 '자동'으로 구입을 한다.


(2) 5게임 중에 3게임 이상 3개의 연속된 번호가 징검다리 형식으로 배열되어 있으면

그 번호가 나올 확률이 높다.


이렇게

7,25,40

5,30,42

7,25,40

2,15,30

7,25,40


이렇게 7,25,40이 징검다리 형식으로 3개 나열되어 있다.

그렇다면 저 3개의 번호 모두 또는 그 중 하나가 나올 확률이 높다.


(3) 같은 번호가 3개 이상 대각선으로 연결되어 있으면 그 번호는 나올 확률이 높다.


이렇게

X,7,X,X,X,X

X,X,7,X,X,X

X,X,X,7,X,X

X,X,X,X,X,X

X,X,X,X,X,X


(4) 같은 번호 3개가 삼각형으로 연결되어 있으면 그 번호가 나올 확률이 높고

또한 그 주변에 a수도 눈여겨 봐야 한다.


이렇게

X,X,7,a,X,X

X,X,a,7,X,X

X,X,7,a,X,X

X,X,X,X,X,X

X,X,X,X,X,X


(5) 1게임에서 3연번이 나오면 그 번호 모두 또는 그 중 하나가 나올 확률이 높다.

1,2,3이나 10,11,12 나 15,16,17과 같은 수.


(6) 자동 5게임 중에서 제일 첫번째 시작 수가 10번 이상이면 그 번호는 나올 확률이 높다.


이렇게

1,x,x,x,x,x

8,x,x,x,x,x

5,x,x,x,x,x

14,x,x,x,x,x

2,x,x,x,x,x


그렇다면 14가 나올 확률이 높다.


(7) 자동 5게임 중에서 제일 끝수가 35번 이하이면 그 번호는 나올 확률이 높다.


x,x,x,x,x,39

x,x,x,x,x,44

x,x,x,x,x,41

x,x,x,x,x,43

x,x,x,x,x,34


그렇다면 34가 나올 확률이 높다.


이 정도가 화성인 바이러스 방송에서 공개한 내용들이다.


마치 '오늘의 운세'처럼 매일매일 자동으로 자신이 직접 구입을 하고

그 구입한 종이를 토대로 해서 1등 당첨수를 추려낸 후 다양한 조합을 통해

당첨번호를 마킹한다는 내용인데,


이에 대한 반론으로는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 B.F.Skinner의 '미신을 믿는 비둘기'실험과

동일한 내용 아닌가? 하는 주장이 있다.


'미신을 믿는 비둘기'실험에 대해 잠시 소개하자면,


비둘기들에게 먹이를 줄 때 소리신호와 함께 먹이를 준다. 
며칠이 지나고 소리가 나면 먹을 것이 생긴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

비둘기들은 소리만 나면 먹이가 나오는 곳으로 몰려들게 되었다.


그 뒤 비둘기들에게는 소리를 없애고 일정한 간격으로 먹을 것만 주었다.

며칠이 지나고 비둘기들은 각기 이상한 행동들을 취하기 시작했다.

상자의 모서리를 부리로 쪼아대는 녀석, 상자안을 원을 그리며 돌아다니는 녀석 등등..

해당 먹이를 먹었던 때에 비둘기가 우연히 행했던 자신의 행동이

마치 먹이를 먹게 된 것과 인과관계로 연결되었다고 생각해서 비둘기가

그 행동을 반복적으로 한 것이었다. 실제로는 전혀 인과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한 그 행동에 때마침 먹이가 나왔고 그러자 그 비둘기는

'이 행동을 하면 먹이가 나온다'라고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반론자들은 B.F.Skinner의 실험 내용을 토대로

'박삼수씨가 쓰는 분석 방법'은 윗실험에서의 '비둘기가 우연히 한 행동'이고

'로또 1등 당첨이란 행운'은 윗실험에서의 '먹이'가 아닌가? 하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런 반론에도 불구하고 박삼수씨의 로또 분석 이론과 방송 내용이

좋은 평가를 받는 점은, 과거 1등 당첨 번호를 기반으로 분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말은 곧, 과거의 데이터를 토대로 하지 않고 오직 자신만의

그 날 그 날의 기운(!?)에 따라 번호를 추출하기 때문에

업체에 아웃소싱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즉, 어떤 업체가 "내가 슈퍼 컴퓨터로, 과거 1등 번호를 토대로,

독자 개발한 당첨 이론으로(구체적인건 비밀이야!), 뛰어나게 분석해줄게!

대신 로또 살 돈 좀 빼서 매달 나한테 얼마씩 줘!"라는 식의

마케팅을 전혀 쓸 수 없는 이론이라는 점인데,


그것은 곧 화성인 바이러스 방송 출연이 정말 '순수한 목적'

그 하나 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화성인 바이러스 박삼수씨 이론.

끝.





8. 서울대생의 인생과 로또 이론


이 글은 2010년 8월 즈음에 서울대생이 올린 글인데
워낙 유명한 글이라 다른 부연 설명 없이 그냥 본문만을 게재함.
(이 글은 '꾸준글러' 제 인생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다 줬음.. 개인적으로 고마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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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인생 성공 팁 하나 가르쳐줄게 (로또도 관련^^)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계획을 짜잖아.

그럼 앞으로 이렇게 계획을 짜봐.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어.

아니 실패는 하지 않아, 적어도.


로또 1등 되는 것보다 공부해서 서울대 갈 확률이 더 높아.

주식 콜풋으로 대박 터지는 것보다 공부해서 7급 합격할 확률이 더 높아.


10년 동안 로또를 구입한 사람과 주식을 한 사람은 10년 후에도 지금과 똑같을

확률이 더 높지만, 10년 동안 수능 공부와 7급 공부를 한 사람은 성공은 못하더라도

최소한 SKY의 언저리, 7급·9급의 언저리에 가있을 확률이 매우 높아


왜냐하면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내는 시험 같은 경우는

선형적(계속성, 통일성) 확률이고 체계적 확률이고 연속적 확률이기 때문이야.


(덧붙여서 오로지 합격과 불합격으로만 갈리는 7급·9급 시험 보다는,

의대에 떨어지면 수의대를 갈 수 있고 서울대에 떨어지면 서강대를 갈 수 있는

수능과 같은 시험이 있다면 리스크 헷지 차원에선 더 안정적이지)


로또 1등이 된 백수가 만약 100번 다시 태어난다면 여전히 백수일 확률이 아주 높지만,

서울대 생이 만약 100번 다시 태어난다면 여전히 서울대생일 확률이 아주 높아.


인생의 계획에서 비선형, 비체계적, 불연속적 확률은 모두 제외시켜.


예를 들어,

첫 번째 동전 앞뒤 게임에서 동전의 앞면이 나왔다고

두 번째 게임에서 앞면이 나올 확률이 높아지는 게 아니야.

어차피 확률은 2분의 1로 계속 똑같거든.

주식도 마찬가지로 어제 종합주가지수가 올랐다고

오늘 콜일 확률이 높아지는 게 아니야.

저번 회차 로또에서 7번이 나왔다고 이번 주 로또에서

7번이 나올 확률이 높아지는 게 아니야.

어차피 확률은 매번 똑같아.

이런 불연속적 확률을 연속적인 확률로 착각해서 많은 사람들이

시간과 노력과 돈을 날려.


또,

로또 1등 당첨 확률이 만약 800만분의 1이라면 
확률은 1천원치 사면 800만분의 1, 1만원치 사면 80만분의 1, 10만원치 사면 8만분의 1이라서

많이 사면 많이 살수록 확률은 높아지지만 아쉽게도 로또 1등 당첨의 주인공은 매번 비체계적으로

선택되기 때문에 1천원치 구입한 사람에게도 돌아가고, 10만원치 구입한 사람에게도 돌아가. 

따라서 100만원치 구입해서 8천분의 1까지 확률을 줄여놔도 어차피 로또는 비체계적 확률 게임이기

때문에 100만원치 구입한 사람이 모조리 꽝이 되고 달랑 1천원치 구입한 사람이 1등에 될 수도 있어.

애초에 룰 자체가 비체계적 확률 게임이라서 그래.

근데 이런걸 체계적 확률로 착각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소득에 비해 무리하게 로또를 소비해.

로또를 재밌게 즐기는 팁을 말해주자면, 어차피 비체계적 확률 게임이기 때문에 1천원치 한 장씩 꾸준히 사봐.

일단 게임에 참가를 해두고 자신의 일상생활은 선형적, 체계적, 연속적 확률에 몰입하고 노력하는 거야.

그렇게 열심히 살다가 주말에 잠시 시간 내서 비선형적, 비체계적, 불연속적 확률 게임의 행운이 혹시

자신에게 찾아 왔나 재미 삼아 한번 보는 거지.


하지만,

저런 게 인생의 목표가 되면 정말 행운에 기대다가 10년, 20년, 30년 금방 지나가버린다.


내 말대로 하면 10년 후 횽의 인생은 지금과 적어도 반 이상은 확실히 달라져 있을 거야.

물론 자신이 노력한다는 전제하에- ^^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정말 답이 없어.

하지만 노력이 적용되지 않는 분야에 몇 년을

노력하며 사는 게 진정한 헛짓이라는 걸 깨닫는 게 더 중요해.


공부와 시험은 많은 것들 중에 내가 하나의 예를 든 것일 뿐이고,

'행운이 작용하지 않는 분야'들을 각자의 혜안으로 한번 찾아보는 것도 좋을 거야)


-=-=-=--=-=-=--=-=-=--=-=-=--=-=-=--=-=-=--=-=-=--=-=-=--=-=-=--=-=-=--=-=-=--=-=-=--=-=  

서울대생의 인생과 로또 이론.

개드립 - 서울대생의 인생과 로또 이론 ( https://www.dogdrip.net/121475957 )





Posted by MAESTRO7
ETC2018. 8. 1. 11:36





아래 글은 본인이 2018.07월 중순 경에 리플 포럼 게시판에 올려놓은 코디우스 서버 설치관련 글임 

==========================================================================


안녕하세요

약 한달전 즈음에, 코디우스 열풍이 불어서 2일동안 고생해서 설치 완료했던 홀더입니다.

1.1.3 업그레이드 작업 후, 뭔 짓을 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갑자기 지갑 변동이 없어 코디우스 서버가 망가졌네..라는 생각으로 다시 설치를 진행했는데, 아뿔사 설치가 지랄맞게 안되더군요.

 

여기저기 포럼 / 채팅으로 물어보다가 아래 주소를 통해서 비교적 쉽게 설치를 완료할 수 있어서, 아래 내용과 주소를 공유드리겠습니다.

 

 

[참고 주소]https://github.com/xrp-community/codius-install

codius-install - Codius Installer For Centos, Ubuntu , Debian ...

해외에서도 드럽게 설치 안되서 문의 사항이 쇄도하는데, 알려주는 분도 많지만, 한 두번에 해결되는 사항이 아니라서, 능력자 분이 아예 한방 설치 프로그램을 작성하셨습니다.

아래 내용의 대부분은 위 주소의 스크립트 프로그램을 실행해서 설치한는 내용임을 참고드립니다.

 

[기본 준비사항]

1. 구글 클라우드에서 VM 생성 및 공인아이피(External IP)확인

https://www.youtube.com/watch?v=AoQkBw2h6PU&feature=youtu.be  에서 1:25 ~ 3:00 까지의 내용을 그대로 따라하세요

 

2. Xrp secret 키 준비

 

3. 무료 도메인 설정 가입 및 VM에 연결된 공인아이피도 도메인에 등록하기

https://www.youtube.com/watch?v=AoQkBw2h6PU&feature=youtu.be  에서 3:00 ~ 4:10 까지의 내용을 그대로 따라하세요

 

 

 

[생성된 VM 에 SSh 접속]

->  이건 모두 하실 수 있죠?~ ^^

 

[수퍼관리자 암호 설정]sudo passwd root

->  사용하고자 하는 관리자 암호를 입력해주세요. 

 

[수퍼관리자 로그인]su -

-> 관리자 암호 입력

 

[hostname설정]hostnamectl set-hostname xxx.xxx.xxx

-> 구글의 정책 상, VM이 재부팅 되면, hostname 이 원래 값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이 후의 작업 중 /  코디우스 설치 완료 후에도 재부팅은 하지 않는 것을 전재함.

 

[필수 소스 설치]yum -y install wget 

-> 설치 스크립트를 다운로드 해주는 소스 설치.

 

[설치 시작]wget https://raw.githubusercontent.com/xrp-community/codius-install/master/codius-install.sh -O codius-install.sh && bash codius-install.sh

-> 인터넷을 통해서 필요한 설치 소스를 다운로드 진행 후, 완료되면 자동 실행되어 아래 진행

 

6개 메뉴 중, 1 번을 실행 하여, 설치 진행하기

#1. IP - VM 생성 후, 확인된 공인 아이피(external IP)를 입력

#2. 설정할 hostname  입력

#3. XRP secret 키 입력

#4. Email 주소 입력

---자동 설치 진행---

#5. 도메인 작업 진행 : Y 엔더 -> 2번 반복

#6. 첫번째 도메인 주소 / TXT record 확인 -> 엔터 입력 

#7  두번째 도메인 주소 / TXT record 확인 -> 엔터 입력하지 말고 아래 작업 진행..

    ---- 자신이 가입한 도메인 설정에서 위 2가지 설정을 입력함.----

  ---- https://www.youtube.com/watch?v=AoQkBw2h6PU&feature=youtu.be 에서 13:10 ~ 14:10 까지의 내용을 그대로 따라하세요.

    ---- 입력한 후, 해당 record 가 반영되는 시간을 감안하여, 10분여간 대기하기-----

 

#8. 위 작업이 완료된 후, #7 에서 입력하지 않은 엔터를 누르면, TXT record 를 통해서 정상적으로 통신가능한지 체크 진행  

                    ---- 정상적으로 완료되었다면, IMPORTANT NOTE -- Congratulation  으로 시작하는 메시지 확인

    ----이후 자동 설치 작업 진행-----

 

#9. 완료되였다면, contratulation . it's look like codius installed successfully ...  라는 메시지 출력됨

#10. http://<codisus hostname>/info 등으로 웹브라우저 주소 접속 후, 정상 데이터 출력 확인

#11. http://codiushosts.com/ 에 접속하셔서, 자신의 서버가 등록되어 활성화 되어 있는지 확인과 더불어 지갑의 잔고가 어떻게 변하는지 계속 모니터링 ^^;

Loading

 

!!! 절대 중요한건, 이 이후, 서버를 재부팅하시면 애써 설정한 hostname 이 다시 초기화 되니, 재부팅이 하지 않도록 해주세요. 그럴일도 없지만, !!!!

 

영어가 되시는 분들은 https://gitter.im/codius/codius-chat?at=5b4ce6901c0f906b145ffe40 에 가입하셔서, 이것 저것 물어보시면, 답변해주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Loading

 

좌절하셨던 분들도 위 내용으로 한 번 더 도전하십시오..

인생도 길고, 리플 투자 아마 길어질 것 같으니..해봅시다!!!







Posted by MAESTRO7
ETC2016. 1. 5. 10:17

[유머]우리나라 IT 의 현실

[유머]우리나라 IT 의 현실

 
1. 고객의 설명한 요구사항 : 고객은 요구사항을 프로젝트 팀에게 간략하게만 설명한다. 자신의 요구사항을 적절한 방법으로 자세히 설명할 수 있는고객은 많지 않다. 대부분 대충 설명을 하고 알아서 잘 해주기를 바란다. 
2. 프로젝트 리더(PL)의 이해 : 프로젝트 리더는 고객이 말한 것을 자세히 파악하지 못하고 일부분만 어렴풋이 이해한다(건물의 창문이 원래 9개에서 기다란 3개로 둔갑한다.). 
3. 분석가의 설계 : 업무를 분석하고 설계한 결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고 실제구현되기 어렵게 디자인되어 있다(건물은 둘로 갈라져 있고 가분수의 모양을띠고 있다.). 
4. 영업의 약속 : 고객에게 실현될 수 없는 장밋빛 공약을 남발하여 프로젝트를 더 힘들게 한다(세상에 대한민국에 안 되는 게 어디 있냐고 하지만 놀이기구처럼 환상적인 건물을 지을 수 있다고 허풍을 치다니…….). 
5. 프로젝트 문서 : 프로젝트 산출물은 납기준수라는 미명하에 거의 흔적을 찾아볼수없다(철근구조물흔적만남아있을뿐이해하기는거의불가능하다.). 
6. 고객 청구 금액 : 고객에게 청구하는 금액은 정확한 기준이 없이 들쭉날쭉하다(마치 건물 위로 도르래를 이용하여 왔다갔다 이동하는 운반기구처럼 거의 공짜로 해주겠다고 하다가 만만한 고객을 만나면 과다청구하기도 한다.). 
7. 본사 지원 : 회사에서 지원 받은 것은 전혀 없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프로젝트에서 알아서 잘 해결하라는 미션 임파서블이 프로젝트의 목표이다(지원을 받으면 프로젝트의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오히려 땅이 꺼질 정도로 역효과가 크다.). 
8. 고객이 진짜 필요한 것 : 아뿔싸, 지붕이 있는 2층짜리 예쁜 건물이었다.


Posted by MAESTRO7
ETC2016. 1. 5. 09:28

[기타]마부작침 (摩斧作針)

마부작침 (摩斧作針)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은 젊은 시절 훌륭한 스승을 찾아 입산하여 공부를 했다.

그러나 중도에 그만 싫증이 나서 아무 말 없이 산을 내려왔다.

 
계곡의 어느 시냇가에 이르렀을 때 그는 한 노파를 보았다.

노파는 바위 위에다 열심히 도끼를 갈고 있었다.

이백이 노파에게 물었다.

 
“지금 뭘 하고 계신 건가요?”

“도끼를 갈아서 바늘로 만늘려 하네.”

“아니, 도끼를 간다고 바늘이 되겠습니까?

“중도에 그만 두지만 않는 다면 될 수 있지?

이 말을 들은 이백은 문득 깨달은 바가있어서 다시 산으로 올라가 공부를 계속 했다 한다.


Posted by MAESTRO7
ETC2016. 1. 5. 09:20

[기타]니콜라 테슬라

**니콜라 테슬라 (Nikola Tesla)** 
출생 ~ 사망 : 1856년 7월 9일 (크로아티아) ~ 1943년 1월 7일 
학력 : 프라하대학교 
경력 : 1891년 테슬라 변압기 제작, 1888년 회전자기장법칙 
크로아티아출생으로 20c기 최고의 과학자이다. 
에디슨의 그늘에 가려져 그의 존재가치가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당시 최고의 과학자 에디슨보다도 
사회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 
발명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으려는 에디슨과 달리 니콜라 테슬라는 발명자체의 즐거움을 찾았다.
28세의 나이로 에디슨 회사에 들어간 니콜라 테슬라 거기에서 에디슨이 사용하고 있는 
직류시스템의 문제점을 지적 교류시스템을 바꾸자 주장했다. 
하지만 에디슨은 새내기인 니콜라 테슬라의 그러한 주장을 새겨 듣지 않고 계속 직류시스템을 사용했다. 
하지만 후에 니콜라 테슬라의 주장대로 교류시스템이 월등이 좋다는 결과가 나온다. 
유도전동기발명, 교류발전기, 변압기, 전동기 등의 특허를 가지고 있고, 테슬라코일 발명했다. 
무선에너지전송기술 연구했고, 세계 최초로 나이아가라폭포에 교류발전소를 책임지고 설치했다. 
또 우리가 사용하는 인터넷 바로 그가 발명의 모태가 된것이다. 
당시 이러한 발명을 했을 때 누구도 그를 믿지않았던 사람들.. 그는 정말 시대를 잘못 만난 과학자였다. 
이러기에 인생자체가 참으로 외롭고 불운한 그많은 발명을 했지만 많은 유명한 과학자가 
그의 발명품을 훔쳐가기 일쑤였고... 
에디슨 또한 그러했다고 한다. 노년기 돈이 없어서 약을 사먹지 못했고 가족이 없고 정서적으로 많이 
불안정해서 정신병까지 들었던 니콜라 테슬라 노벨상에 니콜라 테슬라와 에디슨 공동수상을 하기로 했지만... 
니콜라테슬라는 무엇때문인지..노벨상을 사양하고 만다. 
현 미국과학자 85%가 니콜라 테슬라 전기문을 읽고 과학자가 되리고 결심했다고 한다. 
이렇게 수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많은사람들이 그를 알지 못해 정말 안타깝다.
발명을 수익이 아닌 발명자체의 즐거움을 찾았던 니콜라테슬라 그는 진정한 과학자이다!
[USS Eldridge]
필라델피아 실험(Philadelphia Experiment)이라 불리는 이 실험은 워낙 유명한 얘기라 
이곳 저곳에서 들어보았을 것으로 본다. 그럼에도 다시 소개하는 것은 최근 프레스티지 영화를 통해 
니콜라 테슬라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이다.
1943년 행해진 이 실험의 최초 목적은 '투명' 배를 만드는 것이었다. 
적군의 시야, 레이더에서 벗어나 항해를 하기 위한 것으로, 그 이론의 바탕에는 
알버트 아인슈타인 박사의 통일장 이론이 깔려있다. 통일장 이론은 전자기, 중력 등 
힘의 근본이 사실상 하나의 공식으로 서술할 수 있는 것으로 자유로운 전환이 
가능할 것이라는 것이다.
하여튼 이론은 충분한 장비와 에너지만 갖추고 있다면 목표 주변의 빛을 구부려 보이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쟁 중이였던 당시 상황에서 이러한 보이지 않는 장비는 충분히 고려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 
해군은 실험에 많은 돈과 자원, 그리고 실험에 쓸 구축호위함 USS Eldridge를 투입하게 된다 
실험은 1943년 여름 시작되었고 어느 정도 성공적이였다고 볼 수 있다. 
1943년 7월 22일 필라델피아항구에서 행해진 첫번째 실험에서 거의 완전하지는 않지만 
시야에서 사라지는 목표는 달성했다. 대략 '녹색 안개' 덩어리 정도의 모습으로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승무원들은 심각한 구역질로 불평했으며, 전쟁 수행을 목적으로 하는만큼 단순히 레이더에서 
벗어나는 정도로만 수정하게 된다.
재정비한 장비를 가지고 10월 28일 두번째 실험을 시도한다. 
두번째 실험에서는 거의 완전히 보이지 않는 상태에 까지 도달했다가 푸른빛과 함께 
시야에서는 물론 레이더에서도 사라졌다. 그리고 필라델피아 항에서부터 600km 떨어진 
노퍽에 나타났다가 다시 필라델피아 항으로 돌아왔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순간이동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실험의 결과는 끔찍했다. 대원의 일부는 사망, 실종 그리고 일부는 갑판의 철제구조물에 
융합되어 죽어있었다. 나머지 대원들 역시 심각한 정신적 충격으로 정신 분열증에 걸렸던 것이다. 
이 참혹한 결과에 해군은 즉각 실험을 중단하고 관계자들의 입을 막는 한편 
실험에 참가했던 대원들을 세뇌하여 실험을 은폐하였다.
여기서 테슬라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은 실험의 1차 책임자가 테슬라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이는 검증된 사실이 아니고, 필라델피아 실험 자체도 진짜로 행해졌다는 증거가 없다. 
처음 이야기가 나온 것은 Morris Jessup이라는 아마츄어 천문학자이자 UFO연구가였던 사람이 
과거 실험에 참가했다고 하는 사람으로부터 받은 몇 장의 편지에서부터 흘러나온 이야기이다. 
워낙 충격적인 사건이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내용이었기에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졌으며 
1990년에 영화 The Philadelphia Experiment로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레인보우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투명/스텔스 등을 목적으로 행해진 프로젝트였다
전자무기의 창시자, 니콜라 테슬라 알려지지 않은 천재 과학자 
현대사회에서 전기라는 것은 인간생활과 분리시킬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이 전기의 발전에는 에디슨을 위시해서 패러데이, 헤르츠, 볼타 등등 많은 과학자들의 공헌이 있었지만 
전기발전에 누구보다 큰 공헌을 하고도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19세기 후반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가 이 세상에 나왔을 때는 지금과 비교해 
전기가 매우 원시적인 상태였다. 기초적인 전기이론은 어느 정도 확립되어 있었지만 
직류전기밖에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전기는 배터리에서 생성되는 전기 외에는 
대부분이 교류전기다. 교류전기가 보편화되기까지의 과정은 그리 순탄치 않았는데, 
교류전기는 그 이론에서부터 실용화까지 완전히 테슬라의 공적이었다. 
이것만이 테슬라의 업적은 아니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도 아직 소개되지 않은 그의 이론과 발명품들이 너무도 많다. 
만약 그의 업적이 교류전기 하나로 그쳤다면, 
우리는 지금 전기에 관해 에디슨보다 테슬라를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말은 언뜻 듣기에 모순처럼 들릴 것이다. 
그의 업적이 한두 가지에 그쳤다면 잘 알려졌겠지만 너무 크기 때문에 우리가 모른다니, 
납득하기 어려운 말 아닌가.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고, 인간세상에서는 이런 모순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테슬라의 경우를 보고 재차 확인하게 될 뿐이다. 
그의 발명품들은 대단한 것들이었지만, 누군가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빼앗을 뿐만 아니라, 
자기네들만의 무기로 사용할 만한 가공할 위력을 가진 것이기에 
세상에 숨긴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류를 위해 좋은 발명을 하고도 매장된 이가 테슬라만은 아니겠지만, 
테슬라의 경우는 전자기파 비밀무기와 너무나 중요한 관련이 있기에 여기에 소개한다. 
테슬라는 역사 속에 묻혀 버린 무명의 여느 과학자가 아니다. 
이 사람은 제2의 산업혁명을 일으킨 장본인이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란 소리를 들을 정도의 인물이다. 
그럼에도 세상에서 그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는 마차 시대에 살면서 달에 로켓을 보낼 수 있는 것 이상의 미래를 개척한 과학자였다. 
그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을 산 사람이지만, 21세기인 지금에도 세상 사람들이 아는 
최첨단 과학기술보다 훨씬 더 앞선 과학을 만들었다. 
과학소설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90여 년 전에 녹음기, 마이크로피쉬, 홀로그램, 팩스 따위의 
필연적 발명을 예견했고, 1928년에 이미 텔레비전 설계도를 잡지에 발표했으며, 
3차 세계대전 이후에 올 것으로 예상한 미래사회를 묘사한 
<랄프124C41+>라는 소설을 쓴 휴고 건스백(Hugo Gernsback, 1884~1967)은 
이런 테슬라를 가리켜 인류 역사상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과학자라고 평했다. 
아르키메데스나 패러데이 또는 에디슨보다도 훨씬 훌륭하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발명이란 것이 이미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지식을 토대로 만든데 비해서 
니콜라 테슬라는 두 번 다시 생각할 필요도 없이 과학을 창조했다. 
그는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과학자일 뿐 아니라 
미래에도 그를 능가할 과학자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대담무쌍한 담력으로 이룩한 기초지식과 혁명적인 과학 발견은 
지식세계에서 또다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위대한 과학자가 어째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까. 
여기에서 소개하는 테슬라의 자취는 수박 겉핥기 밖에 안되지만, 
읽어 가면서 그 원인을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누군가 조작하고 왜곡한 사실을 절대 진리이자 진실의 역사로 믿는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현대의 인류문명은 전기없이는 상상할 수 없다. 
우리가 그 전기의 혜택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발명왕 에디슨 덕택이라고 흔히들 알고 있다. 
미국의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에디슨관에는 이런 에디슨의 업적을 기리는 전시품들이 가득하고, 
그곳은 항상 방문하는 이들로 붐빈다. 
물론 에디슨이 훌륭한 발명가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또 하나의 커다란 역사 왜곡일 뿐이다. 그는 과학자로 알려졌지만, 
그의 생애를 들여다보면 과학자보다는 사업가로서 더욱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음을 알 수 있다. 
자기 자신이 직접 발명했다는 수많은 발명품은 대부분 그가 채용한 고용인들이 발명한 것으로, 
특허를 자신의 이름으로 등록했기 때문에 기록상 그의 발명품으로 알려진 것뿐이다. 
여기서 무언가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는가. 
테슬라의 과학지식과 발명품은 에디슨이 상상하고 이해할 수 있는 범위보다 몇 차원 더 앞선 것이었다. 
그런데도 왜 에디슨이 사실 이상으로 과대 포장되어 영웅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이런 의문을 뒷받침해 주는 사례가 하나 있다. 
미국 미시건 주 앤아버의 초등학교 교사인 와그너(John Wagner)는 3학년 학생들에게 
테슬라에 대해 가르치고 그의 이름을 되살리기 위해 구리로 만든 그의 흉상을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전시해 줄 것을 요구한 일이 있었다. 
테슬라가 받은 특허번호와 모터가 에디슨관에서 에디슨의 흉상과 함께 전시되고 있어 
관람객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킨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동상은 박물관에 진열되지 못하고 예일대학에 진열되었다. 
이들의 요청에 의해 레빈(Carl Levin)이란 상원의원이 압력을 넣어 겨우 남자화장실 옆 복도 
어두컴컴한 구석에 테슬라의 유물이 담긴 작은 유리상자 하나가 진열되었을 뿐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서 발간한 <발명책(The Smithsonian Book of Invention)>에도 
니콜라 테슬라라는 이름은 나와 있지 않다. 
이 책에는 에디슨이나 경질고무 발명가인 굿이어(Charles Goodyear)를 위시해 전동칫솔이나 
자동토스트기의 발명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요리법을 특허낸 
샌더스(Sanders)대령 같은 사람까지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테슬라는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미국 고등법원에서 라디오 발명가는 마르코니(Guglielmo Marconi)가 아니고 테슬라임을 
오래 전에 판결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르코니가 라디오 발명가로 소개되고 있을 정도이다. 
일련의 사건들로 볼 때 이것은 고의적인 행위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니콜라 테슬라는 세르비아 혈통으로 현재의 크로아티아의 스밀리얀이라는 곳에서
1856년 7월 9일 태어나 1943년 1월 7일 미국 뉴욕에서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숨을 거두었다. 
그가 태어난 19세기 후반 동유럽은 터키가 대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이에 대항한 독립운동이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세르비아 정교회의 신부인 아버지로부터 지적인 지도를 받았고, 
학교교육을 받지는 않았으나 지혜로웠던 어머니에게는 
세상의 근본원칙과 인간의 기본적 도리를 배웠다. 
그가 어머니와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이런 내용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수학자이자 과학자이기도 했지만, 훌륭한 음악가였고 시인이기도 했다. 
그는 피아노 연주를 즐겼으며, 세르비아의 시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가장 친한 문학가이며 언론인이었던 
친구 부인과 죽을 때까지 정신적인 사랑을 나누었고, 
소설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나 음악가 스토코프스키(Leopold Stokowsky) 같은 사람들과 
친분을 나누고 심지어는 이들과 동업하여 회사를 차리기도 했다. 
그가 다섯 살 때 만든 물레방아가 있다. 
그 물레방아는 보통 시골 농가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물레방아가 아니었다. 
그것은 걸름막이가 없고 밋밋한 것이었지만, 물의 흐름에 따라 일정한 속도로 돌아갔다. 
훗날에 그는 같은 원리로 날개 없는 터빈을 발명했다. 
그의 시도가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한번은 지붕 위에서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에 각도를 맞춰 우산을 폈고, 
몸이 가벼워짐을 느낀 그는 분명히 우산을 이용하면 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몸을 날렸다. 
그러나 땅바닥에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그를 그의 어머니가 방으로 옮겨야 했다. 
또 한번은 풍뎅이를 잡아서 엔진을 만든 일이 있다. 
16개의 가는 막대기로 부챗살 모양의 수레바퀴를 만들어 
가운데 축을 고정하여 가볍게 돌게 하고 각 살 끝에 풍뎅이의 발을 풀로 붙였다. 
한 방향으로 향한 16마리의 풍뎅이들이 날기 위해 안간힘을 쓸 때 
수레가 돌아가는 엔진을 고안한 것이다. 
그런데 그때 이웃의 한 친구가 찾아와 병 속에 가득 잡아 놓은 풍뎅이들을 마구 먹어 치워 버렸다. 
그것을 보고 니콜라는 그 다음부터는 아예 이런 발명을 하지 않았다. 
그는 시인으로서도 대단한 경지에 있었다. 
스티아치치(Stjiacic) 라는 세르비아의 한 신부가 세르비아 연방의 젊은 작가시절 
처음 미국을 방문하여 시카고 공립도서관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그 도서관에서 당시 유명했던 세르비아 시인 즈마이-요반(Zmai-Jovan)의 시집을 찾은 그는 
번역자가 니톨라 테슬라임을 확인했다. 
훗날 스티아치치 신부가 라도 박사의 안내로 메트로폴리탄 빌딩 20층에 있는 테슬라의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을 때 “테슬라씨, 당신이 시에도 능통한 줄은 몰랏습니다.” 했더니,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매우 재미있다는 표정으로“세르비아 사람들 중에는 노래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것이지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에디슨, 마르코니, 테슬라 그는 체코의 프라하 대학에서 본격적인 전기기술 교육을 받았다. 
그후 부다페스트의 전화회사에서 일하면서 자기감응모터를 착안하여 거의 완성할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파리로 직장을 잠시 옮겨 에디슨과 절친한 ‘베첼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 
베첼러는 에디슨이 24세에 처음 회사를 차릴 때 고용되었던 기사였으며 
에디슨이 프랑스에 파견해 유럽 대륙에 세운 ‘대륙 에디슨 회사(Continental Edison Company)의 
책임자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 에디슨 회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세계적인 회사였다. 
테슬라는 주변에서 천재로 인정해 주는 기술자였을 뿐 아니라 
여러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으므로 문제 해결사로 여러 곳에 파견되었다. 
1880년대는 새로운 과학의 이기인 전화를 가설하는 것이 각 국가의 커다란 사업이었다. 
그가 일하던 파리의 회사는 에디슨 회사와 함께 독일에 전화시설을 설치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독일 알사스의 스트라스부르에서 전화 설치를 끝내고 개통식 행사를 하기 위해 
황제 빌헬름 1세가 참석한 자리에서 전화선이 누전으로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독일은 이것을 고의적인 사고로 오해했고, 프랑스와의 정치관계까지 악화시키고 말았다. 
그 여파로 테슬라가 일하던 프랑스 회사는 한 푼도 건지지 못하고 계약을 
파기당할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해결사로 파견된 테슬라는 기존 시설을 자기가 고안한 감응모터의 원칙을 이용한 
교류전기로 바꾸어 송전하는 시설로 대치하여 모든 문제를 훌륭하게 해결했다. 
당시 전기는 반 마일 이상을 송전하는 것이 불가능한 직류뿐이라고 여겨지던 때였다. 
테슬라는 이러한 직류의 단점에 착안하여 거리에 관계없이 송전할 수 있는 교류방식을 생각하고 
그 방법을 제시했으나 아무도 관심을 주는 사람이 없던 터에, 
이러한 좋은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의 발명을 증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에디슨만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할 수 있다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어 
테슬라의 공은 에디슨에게로 돌아갔고,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건진 장본인은 결국 무시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교류문제는 사람들의 머리에서 잊혀져 버렸다. 
테슬라가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에디슨은 약속한 돈을 한 푼도 지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베첼러는 테슬라에게 미국으로 가서 에디슨 밑에서 일하면서 
그를 통해 교류전기를 상용화하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하면서 에디슨에게 소개편지를 써주었다. 
1884년 테슬라는 돈 몇 푼과 책 몇 권, 반중력 비행기 설계도와 즐겨 쓴 시집, 
자신의 학술논문집, 가장 중요한 베첼러의 소개편지를 들고 미국에 도착했다. 
그 편지에는 “나는 이 세상에서 두 사람의 위대한 사람을 압니다. 
하나는 에디슨 당신이고, 다른 하나는 이 편지를 가져가는 테슬라라는 젊은이입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미국에 도착한 테슬라는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겨우 차비를 충당하여 에디슨이 있는 뉴저지로 가서 
소개장을 그에게 보여주게 되었다. 에디슨은 편지를 읽고 곧 테슬라를 채용했다. 
유명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에디슨은 당시 직류발전기인 다이나모 발전기를 개량하여 효율을 높이고 고장 빈도를 줄여 
발전단가를 낮추려고 고심하던 중이었다. 
이를 본 테슬라는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에디슨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만일 그 일을 성공하면 5만 달러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 쉽게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욕심에 테슬라는 밤잠을 설쳐가며 여러 날 일한 끝에 
에디슨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월등한 기계를 만들어 냈다. 
에디슨은 물론 이에 대만족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약속한 5만 달러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다. 
결국 돈 이야기를 꺼낸 테슬라에게 에디슨은 그것은 농담이었다고 하면서 
테슬라가 아직 미국의 대화방법을 습득하지 못했다며, 그의 어깨를 두두리며 깔깔대고 웃었다고 한다. 
테슬라는 이 때문에 대단히 실망하고 좌절감마저 갖게 되었다고 후에 술회했다. 
그럼에도 테슬라는 계속 교륙전기의 개발을 종용했다. 
그러나 끝까지 직류가 우월하다고 믿은 에디슨은 
굳이 교류전기를 발전시킬 필요가 없다면서 완고한 태도를 유지했다. 
에디슨에 대한 많은 실망으로 그를 통한 교류전기의 발전계획을 단념하게 된 테슬라는 에디슨을 떠났다. 
후일 그는 에디슨을 평하여 “에디슨은 볏짚 속에 바늘이 떨어지면 지체하지 않고 볏짚 하나하나를 
뒤지기 시작해서 찾을 때가지 꿀벌처럼 일할 사람이다. 
나는 약간의 이론과 계산법으로 그가 들이는 노력의 10퍼센트만으로 원하는 것을 찾는 법을 알기에 
그의 아둔함을 측은하게 여겼다.”라고 말했다.(New York Times, October 19, 1931) 
그 당시는 에디슨의 유명한 백열전등이 각광을 받고 많은 돈을 벌어들이던 때라 
백열전등 이외에 다른 방법을 통한 전등을 발명해 보려고 애쓰던 과학자들이 많았다. 
테슬라는 이미 아크전등을 발명하여 특허를 낸 후라 몇몇 회사로부터 함께 사업하자는 
제의를 받았으나 역시 실권과 이득은 모두 그 사람들이 갖고 자신에게는 아무 이득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그만두게 되었다. 
이때 에디슨과 같은 나이의 젊은 전기기술자이며 사업가적인 기질과 자본을 갖춘 
'웨스팅하우스 전기회사'의 사주 ‘조지 웨스팅하우스’를 만나게 된다. 그는 테슬라의 교류전기 
이론에 심취하고, 그 역시 교류전기만이 유일한 전기보급법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동안 가난에 시달렸던 테슬라는 조지 웨스팅하우스로부터 100만 달러의 제의를 받고 그때까지 등록한 
모든 특허들을 웨스팅하우스에게 팔았다. 
이때부터 에디슨과 웨스팅하우스의 직류, 교류 싸움이 시작되었다. 
학계에서도 이미 익숙해진 직류의 장점을 고수하는 사람들과 
새로운 교류의 장점을 이해하여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로 나뉘어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아주 중요한 일이 벌어지는데, 역사상 처음으로 시카고 ‘세계박람회’가 
1893년 5월 1일에 열린 것이다. 
박람회장에는 25만 개의 전등이 켜질 예정이었고, 
당연히 각 전기회사들은 이 일을 따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되었다. 
결국 낙찰을 받은 회사는 테슬라의 기술을 사들인 ‘웨스팅하우스’였다. 
당시 에디슨은 전등 당 18.5달러에 입찰했고 웨스팅하우스는 4.32달러에 입찰했다. 
이를 계기로 웨스팅하우스는 박람회장 내에 테슬라의 ‘다상자기감응’ 원리를 이용한 
발전기를 설치하고, 직류발전기로는 이런 싼값에 전기보급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여러 개의 
직류발전기를 설치하지 않고도 장거리를 전깃줄로 송전할 수 있다는 증거를 보여줌으로써, 
교류를 실용적인 전기로 완전히 인식시켰던 것이다. 
이 일은 교류가 직류를 능가하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고, 에디슨의 직류를 향한 아집도 막을 내리는 
사건이 되었다. 
1880년대 이후 전기분야 발전은 그야말로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 많은 과학자들이 ‘나이아가라’ 폭포의 수력을 전기에너지로 변환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폭포 가까이에 있는 버팔로 시민들도 실현 가능한 일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버팔로까지의 거리가 22마일이나 되어 직류로는 송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던 중 시카고 박람회에 이어 독일에서도 삼상 교류발전기를 이용해 108마일 떨어진 곳까지 
송전이 가능해지자, 점차 사람들은 버팔로뿐만 아니라 뉴욕시까지도 송전할 수 있고 
실상 거리에 제한이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미 시카고에서 그것을 증명한 웨스팅하우스사가 공사를 맡아 1895년 4월 20일 버팔로시 가정들은 
전기등불을 켜게 되었고, 이후 값싼 에너지와 전기를 이용한 여러 산업이 버팔로시에 몰려들게 되었다. 
즉, 일종의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이리하여 1903년에는 세계의 모든 발전소가 테슬라의 원리를 
이용하여 교류전기를 만들게 되었다. 그는 또한 공명(共鳴)과 관련하여 지대한 발명을 했다. 
그는 여러 형태로 시범을 보였지만 사람들은 보고도 믿지 못할 정도였다. 
그중에 하나가 신문기자들 앞에서 보여준 시범이다. 
그는 100톤을 견딜 수 있다는 두께 5센티미터, 길이 61센티미터, 폭 30센티미터 철판의 
양끝을 고정시켜 놓고 그 위에 탁상시계 크기의 전기진동기를 올리고 한참을 조정했다. 
잠시 후 철판과 진동기의 주파수가 서로 맞았을 때 철판이 떨기 시작하더니 점점 그 정도가 심해져 
결국 철판은 부러지고 말았다. 
이를 목격한 벤슨(A. L. Benson) 기자는 아무리 큰 망치로 두들겼어도 불가능한 일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테슬라는 이어 뉴욕의 고층빌딩 건축장에 가서도 이 조그마한 진동기를 철근에 부착시켜 
그 위에서 일하던 인부들이 지진이 난 줄 알고 혼비백산하게 만든 일도 있다. 
그는 이 원리를 원격지구 역학진동(telegeo dynamic oscillation) 이라고 명명했는데, 
이 원리를 이용하면 적 잠수함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고, 지하 광맥을 찾을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지구도 쪼갤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X-레이도 처음 만들었다. 
1895년 12월 독일의 렌트겐(Wilhelm roentgen) 교수가 
X-레이의 발견과 유용함을 발표하였을 때 
테슬라는 자기가 이미 X-레이를 이용하여 머리를 찍은 사진을 렌트겐에게 보냈다. 
렌트겐은 이를 숨기지 않고 큰 관심을 표명하면서 일반에 공개했다. 
이 때문에 테슬라는 유명해져 잡지사에 기고도 여러 번 하게 되고 강연도 하게 되었다. 
테슬라는 렌트겐 박사에게 영광을 돌리면서도, 그 위험성도 함께 경고했다. 
테슬라의 밑에서 지도를 받으며 잠시 공부한 마르코니(Guglielmo marconi)는 
1900년 12월 21일 영국의 콘월에서 캐나다 뉴파운드랜드로 
짧은 파장을 이용하여 ‘S'라는 글자 하나를 송신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인해 ’마르코니‘는 무선통신의 선구자와 영웅이 되어 라디오의 발명가로 판정이 되었고, 
대단한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2년 전인 1898년 테슬라가 이미 무선통신 라디오의 원리를 특허낸 일이 있었다. 
테슬라가 이에 대해 고소하여 승소했으나, 일단 유명해진 마르코니의 인상이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 있고, 재벌을 배경으로 한 언론 덕택에 마르코니가 테슬라의 기술을 슬쩍
가져갔다는 사실은 세상에서 빛을 보지 못했다. 
테슬라도 이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테슬라는 자기가 그때 실현시키려고 했던 방법이 잘 설비된 철로에서 달리는 호화여객차라고 한다면, 
대기를 매체로 짧은 파장을 이용한 마르코니의 방법으로 알려진 그 방법은 
마치 촌길을 가는 두 바퀴 마차에 비유할 수 있다고 신문기자들에게 설명했다. 
마르코니의 이 방법이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통신방법이며, 100여 년 전인 그때 
테슬라가 말한 방법은 아직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소개되지 않았다. 
그때 테슬라는 계속해서 설명하기를 마르코니의 대기를 통한 송전방법은 대기 상태에 
너무 의존하기 때문에 거리를 고려해야 하며 전파는 대기의 상태 여하에 따라 
많은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자신의 방법은 긴 파장을 이용한 저주파로 지표면을 사용하므로 
거리의 제한이나 기후조건에 의한 제약이 전혀 없다고 했다. 
마르코니가 짧은 파장으로 무선통신과 라디오를 개발하고 있을 때 
테슬라는 롱아일랜드에 ‘워든클리프 타워’를 세우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자기가 말한 방법을 증명하려고 했던 것이다. 
시대를 앞선 발명- 테슬라는 1899년과 1900년 사이 약 1년간 그의 변호사의 배려로 
콜로라도 주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가 있게 되었다. 
이 도시에서는 크나큰 기대를 가지고 그를 환영했으며 그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덕분에 그는 높이 51미터, 직경 18미터나 되는 탑을 건설하고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여러 가지 실험을 하게 된다. 
이 실험을 통해 많은 분야에 확신을 가지게 된 그는 1900년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 
J.P. 모건의 경제적인 후원을 약속받고, 유명한 ‘워든클리프 타워’를 계획하게 된다. 
테슬라가 여기에서 발표한 중요한 주장은 다음과 같다. 
● 지구는 표면이 한 극이 되고 또다른 한 극이 전리층
(電離層, 지상 40~400킬로미터 정도에 형성된 기류층)이 상호 작용하는 
거대한 전기적 공명체(resonator)이다. 
● 지구 자체는 엄청난 전기를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수도관을 연결하듯이 뽑아서 쓰는 기구만 만들면 무료로 전기를 사용할 수 있다. 
● 무선전기 전송 시스템은 지구표면과 전리층에 있는 
기본전파 혹은 고정전파 형태의 에너지를 활용하여 전송할 수 있다. 
테슬라는 1901년 초부터 롱아일랜드에 지상높이 57미터, 지하깊이 37미터의 탑에 
직경 21미터 무게 55톤이나 되는 버섯모양의 금속관을 씌운 워든클리프 타워의 착공에 들어갔다. 
그는 이 탑으로 전기는 무제한으로 무선전송할 수 있고, 
방송국 역할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의 목표는 누구나 필요할 때 아무데서나 무제한의 전기를 아주 싼값에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사람들이 심한 육체노동의 사슬에서 풀려나 평화와 번영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자기 실험실에서 26마일 떨어진 곳에 전깃줄 대신에 
땅을 통해 전기를 보내 200개의 전등을 켜보였다. 
그러나 후원을 약속한 모건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착공에 들어가 이미 기술자들까지 채용한 테슬라는 특허이익의 51퍼센트를 모건의 
소유로 한다는 조건으로 15만 달러의 착수금만 겨우 받았을 뿐이었다. 
결국 ‘워든클리프 타워’ 공사는 좌절되고 이에 따른 경제적 압박이 테슬라를 괴롭혔다. 
그의 이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다만 몇 명의 돈 없는 친구들만이 
그를 위로해 주었을 뿐이었다. 
모건이 지원을 중단한 이유가 자신이 요구한 시설비가 마르코니가 제시한 것에 비해 
너무 많아 경제적으로 수지 타산이 맞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듣고 
테슬라는 마르코니의 목적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일을 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돈이 많이 드는 것이지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사업은 결코 아니라고 설명했다. 
테슬라에 따르면 ‘워든클리프 타워’는 모든 종류의 전신과 음성과 글자를 자유자재로 
세계 어느 곳이든 무선으로 보낼 수 있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 있는 모든 전화와 전신 송신소들의 설비를 개조하지 않고도 
모두 연결시켜 줘서 전화 가입자는 전화 하나로 세계 어디서든 통화가 가능하며, 
같은 원리로 수신기만 가지고 있으면 육지나 바다에 관계없이 세계 어느 곳에서도 
다른 곳에서 들려주는 음악이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고 했다. 
지구 자체가 거대한 도체이기 때문에 당시 유선으로 가능한 일의 대부분이 무선으로 
가능하게 된다는 뜻이다. 
테슬라는 공사 좌절 이후 특히 1905년 이후에는 이렇다 할 일을 해내지 못했다. 
세상 사람들이 그의 천재적인 능력은 인정하면서도 아무도 그에게 투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에 그는 1907년과 1908년에는 심리적으로 좌절감에 빠지기도 했었다고 술회했다. 
그럼에도 그는 쉬지 않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는 이것을 남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기록하여 여러 개의 트렁크 속에 넣어 
약 20여 군데에 분산 보관했다. 
그가 살던 뉴욕 가버너 호텔에는 1만 달러를 들여 만든 금고까지 있었다. 
그는 1943년 1월 7일 아무도 없는 방에서 외롭게 숨졌고, 시체는 호텔 청소부에게 발견되었다. 
그가 미국에 온지 59년이 되는 해였다. 
그가 죽자 FBI는 외국인 자산관리소를 시켜 그의 모든 소지품을 차압했다. 
이에 대해 테슬라를 추모하는 단체들은 그가 남긴 모든 자료를 가져갈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이 
이 길뿐이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10년 후에야 유고슬라비아에 사는 그의 조카가 
상속권을 인정받고 남은 물건들을 돌려받았다. 
이 유물들은 지금 유고슬라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 있는 ‘테슬라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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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거리 통신 
테슬라의 무선송전 주장에 대해 당신 많은 과학자들이 그의 천재적인 능력은 인정하면서도, 
무선송전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많이 했다. 
1893년 시카고 세계박람회에 테슬라는 처음으로 교류방식으로 박람회장 전체에 
전기를 공급했다고 언급했다. 
당시 전기기계의 세계적 권위자였던 독일 베를린 피지코 테크니컬 학회(Physico-Technical Institute)의 
헬름홀츠(Herman von Helmholtz) 수석감사가 이 현장으로 구경을 왔다. 
그는 테슬라에게 무선송전 방식에 관해 설명을 듣고, 이것이 대단히 실용적인 방식임을 인정했다. 
또, 1897년 뉴욕에 온 영국의 켈빈 경은 테슬라의 실험실에서 무선송전 시범을 보고 너무나 놀라 
“그렇다면 당신은 헤르츠파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오?” 하고 물었다. 
테슬라는 이에 “물론 아니지요. 이것은 전류가 아니라 방사선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때까지 켈빈 경은 무선송전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으나 직접 목격한 순간부터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1900년 1월 테슬라는 콜로라도에서 지구 어디든지 무선으로 통신을 할 수 있는 완벽한 기계를 만들었고, 
사진을 세계 각지로 보낼 수도 있으며, 대기를 통해 음악도 보낼 수 있다고 서술했다. 
1915년 10월 <타임>에 실린 테슬라 특집의 내용이다. 
“테슬라는 목소리를 5천마일 이상이나 떨어진 곳에 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소리를 아주 깨끗하게 보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1899년 콜로라도에서 이미 보여주었다. 
테슬라가 답답해하는 것은 15년이 지난 오늘(1915년)에도 사람들이 아직 그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나중에 이것을 좀 더 자세히 설명했다. 전화가입자들이 뉴욕시에 있는 전화교환소에 
등록만 하면 세계 어디서든 같은 전화로 다른 가입자와 통화가 가능한데, 원리는 목소리를 
담은 전류가 지각(地殼)을 통해 전화하는 지역에서 일단 무한의 속도로 시작하여 약 6천마일 
지점에서 광속으로 늦추어졌다가 다시 빨라져 전화받는 지역으로 무한의 속도로 전달되는 것이다. 
이 신기한 무선이란 것은 마치 폭풍이 불어오듯 인간생활에 찾아와 그 기능을 완전히 
발휘하게 될 것이고, 그때가 되면 전 세계에 6개 정도의 무선전화 교환소만 있으면 
목소리뿐만 아니라 영상까지 서로 교환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즉, 오늘날의 TV, 팩스 따위를 능가하는 것들을 1899년에 그는 이미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1926년 1월 30일에 그가 호텔 객실에서 자기 신세를 한탄하면서 적은 글이 있다. 
“모든 실체가 리듬을 가진 분자로서 전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두뇌처럼 작동하게 만드는 
무선이 완전히 적용되는 날에는 인류는 거리 감각을 잊어버리고 즉각적으로 누구와도 
교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사람들이 원거리 전화(tele-phone)와 원거리 영상(tele-vision)으로 
마치 얼굴과 얼굴을 맞댄 것과 다름없이 교신할 것이며…… 
그때의 TV전화는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전화보다도 훨씬 더 간단해져서 
사람들은 윗옷 호주머니에 그 TV전화기를 넣고 다닐 것이다……. 
필경 가장 가치있는 무선 에너지의 원리를 적응시켜 만들 수 있는 이기(利器)는 
연료 없이 현재의 비행기나 비행선이 가지고 있는 여러 한계를 벗어나 자유로이 다닐 수 있는 
비행기의 추진력이 될 것이다……. 
또 각 가정에 배달되는 종이신문 대신에 사람들이 잠자는 동안에 무선으로 각 가정에 
신문이 직접 배달되어 집에서 인쇄된 신문을 읽게 되는 일은 꿈이라기보다 현실에 
훨씬 가까운 이야기이다……. 
그리고 자동차들의 주차문제와 겸하여 상용도로와 개인용무를 위한 도로를 별도로 
사용하는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벨트로 장치된 고층 주차장 빌딩을 세우고 도로는 필요한 대로 겹으로 증폭시키면 된다. 
그러나 자동차와 바퀴를 날개로 대치하는 문명이 도래하면 그런 도로마저 결국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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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광선 
1915년 테슬라는 5천만 볼트의 전기에너지를 무선으로 원거리에 보내 목적물을 파괴하는 것이 
가능하며, 자신은 이미 그 무선송신기를 만들었음을 증명할 수 있고, 이 기구는 세계 아무 곳이나 
원하는 목적물을 정확하게 겨냥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너무나도 황당하게 여겨져 그의 발표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표면적으로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 일이 있고 9년 후인 1924년 갑자기 세계 여러 곳에서 살인광선을 발명했다는 
과학자들의 발표가 잇따랐다. 
1924년 5월 19일 영국의 과학자 그린델매튜스(Harry Grindell-Matthews)는 파리에서 원거리의 
비행기를 격추시킬 수 있는 가공의 전자방사선 기구를 발명했으며, 이 가공할 방사선
(한국어로 광선 또는 방사선이라는 것은 영어로 ray, 또는 beam을 말한다). ray를 흔히 ‘광선’이라고 
번역하지만 ‘광선’이란 용어는 빛을 가진 선이란 선입관을 가지게 되는데 반드시 우리 눈에 
보이는 빛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radiation, 즉 방사(放射)하는 파(波)를 말하기 때문에 위에서 death ray를 ‘살인광선’ 또는 
‘죽음의 방사선’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살인광선’은 빛이 없어 눈에 보이지 않는 선(beam)도 포함한다.)은 전 군대의 행동을 
마비시킬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그의 발표가 너무 과장됐으며, 4마일이나 7~8마일 정도의 
거리라면 몰라도 그 이상의 거리는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에 전 군대의 움직임을 마비시킨다는 
말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고 반박했다. 
이에 대해 그린델매튜스는 이미 독일군은 이러한 장비를 가지고 있다고 재반박했다. 
그리고 같은 달 24일에는 독일의 과학자 볼레(Herr Wolle)가 독일은 ‘죽음의 커튼’이라고 
부르는 전자무기를 세 개나 만들었다고 발표했으며, 다음날인 25일 미국의 과학자 월(T. F. Wall)은 
전기에너지를 사용하여 무선으로 비행기나 자동차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기술을 특허신청하면서 
같은 원리를 외과수술이나 다른 과학 부문에 적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5일 후인 5월 30일 그 전날 뉴욕에서의 발표를 인용한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신문에는 
테슬라가 1900년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있을 때 이미 발명한 눈에 보이지 않는 방사선에 접촉되면 
운행중인 비행기가 그대로 추락하게 된다고 설명한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이러한 발표만 있었지 실제로 사용한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10년이 지난 1934년 테슬라의 78세 생일날 기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 ‘살인광선’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그 죽음의 광선은 완전히 새로운 물리학의 원리를 이용한 것으로서, 1억만분의 1센티미터에 
불과한 이 방사선으로 250마일 거리에 있는 비행기 1만 대를 단번에 떨어뜨릴 수 있으며, 
이 장치를 만드는데 드는 비용은 200만 달러 정도이며 건설하는데 3개월이 소요될 것이라고 했다. 
설명에 따르면, 미국 전역 12곳에 이런 기지를 설치하여 전자망을 치면 마치 중국에서 
만리장성을 쌓아 국가를 보호하듯이 미국은 어떠한 외세의 침입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방사선은 가스, 디젤, 오일 등 어떠한 연료를 사용하든지 관계없이 모든 엔진을 녹여 버리므로 
이 방사선에 대한 방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방사선을 농축하여 사용하면 지나간 자리에 있는 군인이나 장비는 모두 삽시간에 죽고 파괴된다고 한다. 
망원경의 조망권 내에서 또는 지평선의 범위 내에서 정확하게 목표를 겨냥하고 파괴하며, 
소리도 없고 흔적도 없는 효과적인 무기라고 한다. 
1935년 2월호 <리버티>지에 테슬라가 살인광선에 대해 간결하게 설명한 일이 있다. 
“나의 발명에는 큰 시설이 필요하다. 
그러나 일단 그 시설이 완공되면 200마일 이내에 접근하는 적의를 가진 사람이나 기계,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모두 파괴시킬 수 있다. 
우리보다 강한 어떠한 적이 침략해 온다고 해도 이들을 막아낼 장막을 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는 계속해서 자기의 발명과 다른 사람들이 만든 살인광선과의 차이를 설명했다. 
다른 사람들의 살인광선은 다량으로 만들 수도 없고 거리가 멀어질수록 급격하게 약해지지만 
자신의 것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당시 뉴욕에서 소비되는 총 전력량이 200만 마력(15억 와트)이었는데 이 전력을 
모두 사용해도 20마일 밖의 사람은 죽일 수 없는 미약한 양이었다. 
후에 다른 과학자들은 테슬라가 말한 다른 살인광선은 그린델매튜스의 것과 비슷한 
종류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린델매튜스의 살인광선은 높은 전류로 목표물을 타격하기 위해 자외선을 이용한 것이었고, 
자외선 서치라이트의 성능 한계는 테슬라의 것에 비해 훨씬 약했던 것으로 여겨졌다. 
문제는 벌써 20세기 초에 테슬라뿐만 아니라 많은 과학자들이 이런 발표를 여러 번 했는데, 
지금은 그 아이디어가 갑자기 사라져 버리고 어린이 공상과학만화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 때 소련의 고르바초프 수상과 대결하여 최신과학을 동원하는 소위 
‘스타워즈’를 전개하겠다고 호언하던 그 과학은 과연 21세기의 최신 과학이었는가. 
아니면 테슬라를 위시한 1920년대의 여러 과학자들의 망상에 불과한 것인가? 
또는 그때 그 자료들을 세계의 모든 정부들을 좌지우지하는 누상(樓上)의 엘리트들이 빼앗고, 
지상에서는 그 누구도 사용하지 못하도록 아예 없던 일로 만든 것인가?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로서는 나름대로 결론을 지을 수밖에 없는 이 의문은 또다른 끝없는 질문과 
상상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콜럼비아 대학에서 무기를 연구하던(현 워싱턴 DC에 소재한 국방분석 연구소 소속) 
젊은 과학자 타운스(Charles Hard Townes)는 아주 짧은 초단파를 만들기 위해서 고심한 끝에 
4년 만인 1950년에 메이저 
광선을 만들었다. 
이 원리를 이용하여 1958년 하워드휴즈 항공사에서는 레이저 Emission of Radiation)> 광선을 만들었는데, 그렇다면 이 광선들은 이미 테슬라가 반세기 이전에 
말하던 가공할 광선의 일종인가? 
테슬라는 태양광선보다 50배 빠른 속도를 가진 빛을 개발했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는 또 거의 돈을 들이지 않고도 영상을 포함한 모든 통신이 가능하다고 했다. 
요즘엔 레이저 하나가 TV 프로그램 2만 5천 개를 동시에 송신할 수 있다. 
그렇다면 테슬라가 이미 개발했다고 말한 그 단계에 도달하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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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등 
테슬라는 에디슨의 백열전등을 아주 조잡하고 미개한 것으로 여겼다. 
그가 시범을 보인 전등은 성능이나 품질 면에서 훨씬 더 다양하고 월등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발명한 전등을 상용화하려고 노력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의 비-헤르츠파 전등과 유사한 형광등이 반세기가 훨씬 지나서 세상에 선을 보이기는 했지만 
아직도 이 세상에는 그가 제시했던 전등이 소개되지 않고 있다. 
또 그는 친구인 음악가 스토코프스키와 작가인 트웨인, 
부호의 아들 전기기술자 해몬드(Jack Hammond Jr.) 등과 동업으로 회사를 만들어
전등은 물론 형광등을 이용한 사진기술을 개발하는 사업을 벌인 일이 있다. 
이때 마크 트웨인이 테슬라의 실험실에서 형광등을 켜보이는 사진
(1894년 유명 작가 마크 트웨인이 친구 테슬라의 실험실에서 전등을 손에 잡고 손수 실험을 
해보고 있는 장면)이 지금도 남아 있어 테슬라가 에디슨의 백열등보다 훨씬 진보된 전등을 
만들었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테슬라가 자기 방에서 전깃줄 없이 불이 켜진 전등을 쥐고 있는 사진도 유명하다. 
이는 100만 볼트라는 고압의 전류를 직접 자기의 몸을 통하여 전등이 켜지게 한 것이다. 
이것이 테슬라가 개발한 또다른 전등 '동적전자감응전구‘(Electro Dynamic Induction Lamp)로 
전깃줄 대신 감응으로 켜지는 전등이다. 
21세기에 들어선 현재의 테크놀로지로도 상상하지 못하는 발명품인데, 
이것을 테슬라는 1894년 특허까지 받아 놓았다.(U.S. Patent 514170) 
그는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있을 때 200개의 전등을 발전소에서 4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전깃줄 없이 켜보이기도 했고, 역시 전선 없이 전기를 전달하여 마치 필라멘트처럼 40미터 길이의 
두 갈래로 된 불꽃을 탑과 탑 사이에 일어나도록 하여 운동장만한 크기의 지역을 밝히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햇빛은 태양에서부터 9천 4백만 마일 되는 거리를 통과해 지구에 도달하는 
진동에 의한 것으로서, 자기가 태양광선을 형성하는 진동과 흡사한 진동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태양광선과 비슷한 광선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더군다나 이 광선은 구름이나 다른 방해물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태양광선은 우주의 공간 ‘에테르(ether)에서 1초에 500조 번 진동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진동을 만들기만 하면 되는데, 이미 자기의 기기로 어느 정도까지 진동을 만들었으니 
조금 더 개량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바로 동적전자감응전구를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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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격제어 어뢰 
1907년 3월 20일 <뉴욕타임스>에 ‘테슬라의 무선어뢰’라는 제목의 기사가 났다. 
그 내용은 테슬라가 멀리서 전파로 조종할 수 있는 어뢰를 만들어 실험도 끝냈지만, 
무선으로 전파를 보내 직접 파괴하는 것이 훨씬 더 위력이 크다면서, 자기가 만든 기구로 전기에너지를 
농축시켜 원하는 지점 어디에나 낙하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레나(Lena)라는 프랑스 선박이 이상하게 전기불꽃이 튀면서 폭발한 사고가 있었는데 
아무도 그 이유를 모를 때 <뉴욕타임스> 기자가 테슬라에게 질문을 했던 것이다. 
테슬라는 이어서 어뢰를 원격조종하기도 하지만 같은 방법으로 어뢰를 공중의 비행체나 수중 잠수체로 
변형시켜 이곳으로부터 강력한 전파를 발사하여 목표물을 폭발시킬 수도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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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테르 연료 자동차 
현재 세계의 화석연료가 고갈되어 가고 있고 피할 수 없는‘연료 대란’을 목전에 둔 현실에서 
테슬라가 영원히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대기 중의 에너지를 사용하여 고성능의 자동차를 버팔로 
시내에서 질주했다는 것은 생각 있는 과학도들에게 자극제가 될 것이다. 
근래에 와선 건전지를 이용한 전기자동차가 한참 대두되더니 요즘에는 연료전지(fuel cell)를 이용한 
전기자동차가 크게 대두되고 있다. 
그때 캐나다 발라드(Ballard Power System)사가 세계 최초로 연료전지 개발에 착수하여 일본이나 
독일 유수 자동차 회사들과 합작으로 기술개발을 진행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요즘 한국의 대기업 중에서도 
대체에너지 연구에 뛰어든 곳이 있어 희망을 가져본다. 
전기자동차에 대한 인류의 관심은 20세기 후반과 21세기에 들어와서 화석연료 고갈이나 환경문제 
때문에 촉발된 것이 아니다. 
1920년대에 이미 전기자동차의 필요성에 관심이 고조되었고, 각 자동차 제작사들이 전기모터를 
사용하는 자동차를 선보이기도 했다. 
당시는 내연엔진을 시동할 때 앞에서 크랭크를 돌려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고 미션도 
지금처럼 속도를 변환하는 데 매끄럽지 않았으며 여러 가지 잔고장도 많고 정비 또한 
간단하지 않았다. 
반면에 전기모터를 사용하는 자동차는 조작이 아주 쉽고 변속할 때 덜컹댈 염려가 없어 
여자들도 쉽게 운전할 수 있었고, 기계 자체가 매우 간단해 고장 염려도 별로 없기에 백화점 
배달트럭이나 의사들 왕진용으로 주로 사용되고 있었다. 
당시 전기자동차 출시로 유명했던 회사들은 
디트로이트 일렉트릭(Detroit Electric), 콜롬비아(Columbia), 베이커(Baker), 
라우시&랭(Lauch&Lang), 우즈(Woods) 같은 회사들이었다. 
지금은 모두 생소한 이름이지만, 그때는 포드, GM 같은 회사들도 여러 자동차 회사들 
틈에 끼어 생존경쟁을 하고 있었다. 전기자동차는 배터리로 에너지를 공급하기 때문에 
무겁고 덩치가 크며 속력이나 운행시간에 제한이 있는 것이 단점이었으나 그런 상황에서도 
특수 용도로서의 인기는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내연엔진의 셀프모터의 등장으로 스위치 하나로 시동이 가능해지자 전기자동차의 
인기는 급속히 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전기자동차는 직류모터를 사용하는데, 이에 반해 테슬라는 교류모터를 사용했고 
차 뒤에는 180센티미터 정독 길이의 안테나를 장착했다. 
1931년 피어스-애로사와의 계약하에 진행된 테슬라의 실험중 자동차를 시험운전한 사람은 
테슬라와 같은 유고슬라비아 태생으로 오스트리아 공군 조종사 출신이었으며, 
테슬라를 삼촌이라고 부르며 따르던, 피타 사보(Petar Savo)라는 32세의 청년이었다. 
1960년대에 와서 사보가 증언한 바에 따르면, 그들은 버팔로의 어느 작은 차고에 들어가서 
자동차 본네트를 열고 가져온 진공관 12개를 장치에 꽂고 무언가를 조금 조종하고 시동을 걸었다. 
전기를 일으키는 장치는 길이 60센티미터에 폭 30센티미터, 높이 15센티미터의 상자처럼 생겼으며, 
사용한 진공관은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후에 3개는 70L7-GT 진공관으로 밝혀졌다. 
사보가 운전대에 앉고 테슬라는 보조석에 앉아 지시하는 대로 시동스위치를 켰는데 아무 소음이 없었고, 
전진기어를 넣고 가속페달을 밟으니 앞으로 굴러 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버팔로 시내를 거쳐 시외에까지 다니면서 시험운전을 했다. 
속도계는 120마일(시속 192km)까지 있었으나 90마일(시속 145km)까지 밟았고 
그런 고속에서도 자동차는 아주 조용했다. 시험운전을 마친 테슬라는 확신을 얻고 
자동차에 대해 설명했다. 
그 자동차는 연료가 전혀 필요 없으며, 여기에 사용된 원리는 자동차를 움직일 뿐 아니라 
가정에 전기도 공급하게 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기차, 선박, 비행기에도 사용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모터의 원리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으나 그의 장치는 단순히 에테르에 있는 
신비스런 방사선을 받는 장치일 뿐이며, 그 방사선은 공중에 무궁무진하게 존재하므로 
인간은 대기에 그런 에너지가 한없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보는 그 후 8일 동안 계속 그 차로 시내와 시외를 운전하고 다녔으나 피어스-애로사의 
휘발유 차종 8기통 125마력(bhp), 366in³ (6천cc)짜리 차의 성능과 거의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마지막 시험운전을 끝낸 그들은 자동차를 다시 버팔로에서 20마일 떨어진 교외의 어느 
비밀장소에 가져다 놓고, 시동키와 전기장치를 떼어내 집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테슬라의 비서가 허락도 없이 차에 대한 소문을 퍼트린 덕분에 테슬라는 어떻게 배터리 없는 
전기자동차를 만들 수 있으며 전원은 어디에서 얻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게 되었다. 
이에 대해 테슬라는 주변에 널려 있는 에테르에서 얻는다고 마지못해 대답을 했다. 
그때 테슬라가 미쳤다는 사람도 있었고 악마를 신봉하는 조직과 연루되어 마귀의 힘을 빌려 괴상한 
이적 행위를 한다는 말도 있었다. 
피어스-애로사와 협상이 잘 되지 않았거나 다른 사정 때문인지 이 전기자동차는 결국 빛을 보지 못했고 
이로 인해 테슬라는 다시 뉴욕시로 돌아가면서 그 장치를 분해해서 없애 버렸다. 
참고로 에테르에 대해 설명 하겠다. 
원래 에테르는 하나의 가설로, 19세기에 빛, 열, 전자파 같은 것을 전달하는 매체이자 
우주공간을 채우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물질로 이해되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미켈슨-몰리(Michelson-Morley)나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같은 
과학자 덕분에 불필요한 가설이 되었고, 지금은 마치 전기가 양극에서 음극으로 흐른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가정에 불과하다. 
테슬라가 사회의 통념을 따라 ‘에테르’라고 표현했지만, 
실제 그가 말한 것은 ‘슈만공명’을 의미했다. 
그는 지구 표면에서 전리층(고도 약 80킬로미터) 사이를 ‘슈만층’(Schumann cavity)이라 하고, 
슈만층에는 7.83헤르츠의 전자기파가 흐르고 있는데 이를 슈만공면 또는 ‘지구 자장의 맥박’이라고 했다. 
이 파장은 지구 표면의 슈만층 어느 곳에나 전혀 약화됨이 없이 돌고 있다는 것이다. 
테슬라가 자동차에 사용한 무료전기는 바로 이 슈만공명을 잡아 전기에너지로 변환시킨다는 의미였고, 
누구나 간단한 변환기만 있으면 지구 어느 곳에서나 쉽게 전기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그가 이미 그 기구를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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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칼라파 
테슬라가 콜로라도 스프링스에서의 실험을 통해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은 ‘스칼라파’라고 하는 
‘종파’(縱波, longitudinal wave)에 대한 이론이다. 
테슬라가 지구에 이미 존재하는 전기에너지를 지구 어느 곳이든 쉽게 보낼 수 있다고 한 것은 
전자파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 종파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테슬라가 호언장담한 것으로 보아 이미 완전히 독자적으로 이론뿐만 아니라 
실용단계까지 도달한 것 같다. 
1960년대에 미 국방성 소속 과학자 리치몬드(Walter Richmond)와 비어든(Thomas Bearden) 
중령이 이 ‘스칼라파’를 발견했다. 비어든 중령의 말에 의하면, 1963년 소련이 미국의 원자력잠수함 
트레셔(Thresher)호를 격파시킨 것이 이 테슬라의 원리를 이용하여 만든 소위 ‘사이코트로닉 무기’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1999년 봄 이름을 밝히지 않은 미 육군의 한 장성은 아트 벨(Art Bell)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광선속도(초석 30만 킬로미터)의 4.7배나 되는 속도로 통신이 
가능한 단계까지 종단파를 개발했다고 발표하면서, 이것은 해저 어느 곳에 있는 잠수함도 찾아 
폭파시킬 수 있고, 실내 온도에서 바위를 녹일 수도 있는 정도라고 말했다. 
물론 이것은 21세기 과학에 해당하는 첨단과학이며, 극비에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통상적으로 전파의 속도가 광선의 속도와 같다는 이론을 완전히 뒤엎은 세계가 
놀랄 만한 이야기이지만 거의 100년 전에 이미 테슬라가 혼자서 개발하여 실제 사용하려고 
했던 것을 돈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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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조종 
 
1914년 테슬라는 대기 중에 있는 습기에 존재하는 전기를 조작하여 바다에서 무제한의
수분을 끌어오는 것이 가능하며, 전자기파 조작만으로도 산불도 끄고, 짐승이나 곤충, 미생물 등 
생물의 멸종이나 파괴를 막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항상 주장하기를 지구의 크기도 조정할 수 있으며, 우주의 행로를 바꾸어 
계절을 조절할 수도 있고, 지구를 다른 행성과 충돌시킬 수도 있으며, 유사 태양을 만들어 
빛과 열을 생성하여 공급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고, 항상 천재에서 미치광이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테슬라가 이런 원칙을 이용하여 기후를 조종할 수 있다고 말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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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퉁구스카 폭발 
 
시베리아 퉁구스카 사건
사건당시 그지역에는 니콜라 테슬라의 전류방패막 연구소가 있었다,
250만와트=2500Kwh의 전력으로 작동되는 전류방패막에 포탄을 발사해서 방어하는 
실험이 있었다고한다,
그때 하늘을 거슬러 올라가는 거대한 불덩어리를 많은 이들이 목격했다고한다,
포탄은 전류방패막과 충돌해서 그때 생겨나는 반발력으로 튕겨져 하늘로 날아간 것이다,
포탄과 전류방패막의 충돌시 전류방패막은 급격한 진동을 일으켰다,
이러한 진동은 즉 제동복사효과를 일으켜 막대한 양의 가시광선,자외선,적외선,전자기충격파,
공기의 충격파를 발생했다,
그때 발생된 파괴력은 15메가톤의 핵무기와 맞먹는다,(제주도면적에 파괴를 입히는 위력)
1908년 6월 30일 오전 7시 17분 바이칼 호수 북쪽 시베리아 포드카메나야 퉁구스카 강 지역 
상공 8킬로미터 지점에서 이상하고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퉁구스카 강 주변은 툰드라가 끝난 남쪽의 광대한 침엽수 원시림 지역이었다. 
이 폭발로 바로 밑에 있던 2,150 평방킬로미터 면적에 초속 60킬로미터 강풍에 해당하는 공기파와 
섭씨 1,660만도 정도의 열파가 덮쳤으며, 다음 약 8천 평방킬로미터 지역에 8천만 그루 이상 되는 
나무들이 불에 탔다. 
폭발의 충격파는 런던 지진관측소에까지 감지되었는데, 그 위력은 진도 5의 지진 또는 TNT 10~15 
메가톤에 해당하는 것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의 약 2천 배 규모였다. 
이 지역은 광활한 무인지대로 알려져 있으나, 그 속에는 원주민들이 간헐적으로 작은 마을을 
구성하고 살았으며, 많은 사슴떼도 살고 있었다. 
즉, 이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이다. 1960년 우바로프(Valery Uvarov) 박사의 조사 때에도 
인근에서 약 3천 명의 목격자들이 살아 있었다. 
이들에 의하면 북북동쪽 하늘이 밤새 오렌지색을 띤 강력한 노란빛이었고 다음날 아침 동이 틀 때까지 
훤했으며, 빛이 번쩍이거나 깜빡거리는 일도 없었고, 무지개나 오로라처럼 빛줄기가 나타나는 경향도 
전혀 없었다고 한다.
(‘The Fire Came By',Spenser Russell.The Royal Meteorological Society Quaterly,1930.) 
세계적인 과학자들로 구성된 조사단이 여러 차례 답사하여 땅을 40미터나 파보았는데도 운석이나 
분화구의 흔적이 없었기 때문에 핵폭탄이나 유성이 떨어진 것은 아니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어떤 이들은 블랙홀이나 반물질(antimatter) 같은 설을 주장하지만, 
모두 모순이 많아 여전히 과학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상태이다. 
한편 이 사고에 대해 테슬라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 니켈슨(Oliver Nichelson)이 가장 강력하게 주장했는데, 테슬라가 무선으로 엄청난 양의 전기를 
원하는 곳에 보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를 무기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을 누누이 했다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테슬라는 송전시스템을 무기로 사용하려면, 지구의 전기 상황을 조작, 변형시켜야 한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지구에 대전된 전기의 진동을 송전기와 맞추면 나침반도 다르게 작용할 것이고, 
대기 상층부는 마치 그의 실험실에서 사용하는 전구 속에 들어 있는 가스와 같은 성질을 띠기 때문에 
지구 전체를 하나의 전기 부속처럼 취급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그는 일반 전기송전과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송전의 차이는 다만 시간의 차이일 뿐이라고 했다. 
워든클리프 타워로 전압 1억 볼트에 전류 1천 암페어까지 실험을 해본 그는, 만약 이런 전량을 
아주 짧은 시간에 방출하게 되면 TNT 수백만 톤을 터트리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며, 
이런 전기 덩어리를 지구 어디든지 원하는 곳에 빛의 속도로 보낸다면 
그 지역은 순식간에 증발해 버릴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The Tesla's High Frequency Oscillator',Winfield H. Secor,The Electrical Examiner, 
March, 1916. p. 615.) 테슬라가 퉁그스카 폭발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또 다른 근거는 1900년부터 약 10년간이 테슬라가 가장 극심한 좌절감으로 고심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모건을 위시한 모든 재벌가들이 재정 지원을 거부했고, 과학계마저도 그의 논리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는 절박한 심정에서 무선송전이라는 그의 발명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주기 위해 
인명 피해가 없는 지역을 선택하여 시범을 보였고, 그것이 1908년 퉁구스카 폭발이라는 것이다. 
평화주의와 인본주의 사상이 투철했던 그가 많은 짐승과 원주민들을 죽이는 일을 했을리 
없다는 주장도 있지만, 필경 테슬라 자신도 예기치 않았던 훨씬 큰 위력이 나타난 것일 수도 있고, 
테슬라가 원했던 장소에서 빗나간 것일 수도 있다. 
목표가 빗나갔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당시 피어리(Robert E. Peary)는 10여 년 동안 계속해서 북극 지역을 측량하고 탐험했는데,
(1902,1906,1909년 북극 정복) 그 탐험팀의 기지가 캐나다의 최북단 엘레스미어 섬의 앨러트였다. 
이 앨러트는 지구본에서 워든클리프 타워와 퉁구스카를 북극을 통해 직선으로 연결하면 
바로 그 선상에 있었다. 
그래서 혹시 테슬라의 원래 의도는 피어리 탐험팀이 가까이에 있는 북극 어느 곳을 목표로 해서 
그로 하여금 폭발의 규모를 증언하도록 하려 했던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다.
자신의 발명이 위대함을 증명해 보이고 자기주장의 중요성을 대대적으로 펼쳐 여론을 몰아 자본가나 
투자자들의 주목을 끌러 보려 했으나, 뜻하지 않은 인명 피해와 자연파괴 때문에 
오히려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 입을 다물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하는 것이다. 
여하튼 테슬라가 퉁구스카 폭발의 장본인이 아니었다면, 
그가 주장한 ‘저주파 현상’이나 ‘슈만진동’을 위시한 여러 원리와 학설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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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델피아 실험 
 
2차 세계대전 때 미 해군은 독일의 레이더망에 포착되지 않기 위한 피닉스 작전의 일환으로, 
테슬라를 위시해서 폰노이만(John Von Neumann), 허친슨(John Hutchinson), 
커텐아워(Emil Kurtenhour), 아인슈타인 같은 당시의 석학들을 소집하여 무지개 
작전이라는 실험을 했다. 
이 작전은 필라델피아 해군 항만에서 이루어 졌는데 보통 ‘필라델피아 실험’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테슬라가 책임자로 있어 다른 과학자들은 그의 지시를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과학자들이 고집을 피워 테슬라를 따르지 않게 되자 테슬라는 사임하고, 
그의 뒤를 이어 폰노이만이 책임자를 맡게 되었다. 
폰노이만은 헝가리에서 태어난 수학 신동으로, 6살 때 암산으로 8자리 나눗셈을 할 정도였으며, 
당대 가장 뛰어난 수학자 중 하나였다. 
그는 독일과 스위스에서 연구하다가 1930년에 미국으로 건너와 프린스턴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폰노이만 기계라는 최초의 컴퓨터를 만든 사람으로
‘폰노이만 대수’, ‘오퍼레이터 이론’, 게임이론 등을 개발했고, 독일 물리학자 
하이젠버그(Werner Heisenberg)의 ‘불확실성 원리’를 ‘양자물리학의 수학적 기본’이라는 
이론으로 증명하기도 했으며,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로 흐르는 선상(線上)의 움직임이 아니라고 
증명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그가 남긴 업적은 수없이 많다. 
1903년대에 들어서면서 니콜라 테슬라는 이미 수명의 다른 과학자들과‘시공간 연속체’라는 
다른 차원으로 옮겨 다니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전기를 이용하여 물체가 보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은 시카고 대학에서도 이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한편 이보다 먼저 아인슈타인도 ‘중력과 전기의 통일장 이론’을 발표하고, 
이 원리를 이용하여 바다에서 전자기파로 배를 위장하는 방법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1925년~1927년 사이에 독일어로 이 논문을 
프러시아 과학저널에 발표했으나 후에 완전하지 못하다고 철회했다.) 
폰노이만이 있었던 프린스턴 대학의 진보학문연구소(Institute of Advanced Studies)는 1939년 
작은 물체를 보이지 않게 하는 데 성공했다. 
이 연구소는 이를 미 정부에 알렸으며, 군에서는 당시 전쟁에 돌입한 상황을 고려하여 
이를 실전에 이용하려고 계획했다. 이것이 ‘무지개 작전’으로 구체화되었고, 
결론은 테슬라 코일 4개를 작동시켜 자장을 만들고 그 자장으로 소위 ‘과도공간기포’
(Hyper Space Bubble)를 물체 주변에 조성해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 원리는 함선 주변에 아주 강력한 자장을 만들어 감싸면 태양빛 같은 광선이나 레이더등에 
사용하는 전파는 마치 아지랑이처럼 굴절하게 되어 보이지 않게 되며, 혹시라도 적이 
어뢰를 발사하면 그 진로가 굴절되어 옆으로 빗나가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 실험은 마치 보이지 않는 옷을 몸에 입히는 것처럼 배가 적에게 노출되지 않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었다. 
그때 아인슈타인과 테슬라는 만약 이런 기술이 개발된다면 인류를 위해 사용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경고를 했다. 
드디어 1943년 여름, 뉴욕 해군 항만기지 소속 엘드리지(USS Eldridge DE 173) 경구축함에 
75Kwh(1500억V로 승압)발전기 두 대,자장을 만드는 테슬라 코일 4개를 위시한 
여러 전기기구를 가득 싣고 필라델피아 해군 항 앞바다에서 실험이 시작됐다. 
1943년 7월 22일 오전 9시에 함상의 발전기를 발동시켰고, 
곧 선박 주변이 초록색 안개로 가려지면서 선박은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얼마 후 안개 자체가 걷히면서 선박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 
이를 주시하던 해군 고위 장교들이나 과학자들은 선박이 레이더망만 잡히지 않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도 볼 수 없다는 것에 대단히 만족해 했다. 
얼마 후 발전기를 끄도록 명령하자 다시 초록색 안개가 서서히 나타났다가 그 안개가 
가라앉으면서 엘드리지 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육지에 있던 관련자들이 승선해 보니 무언가 매우 잘못되어 있음을 알았다. 
갑판에 있던 선원들은 얼이 빠져 있었고, 매스꺼움과 어지러움을 호소했다. 
그래서 당국은 선원들을 모두 교체시키고, 앞으로는 레이더에만 감지되지 않게 만드는 
방향으로 실험을 변경했다. 10월 28일 오후 5시 15분, 다시 실험이 시작되었다. 
발전기를 발동하고 테슬라 코일이 작동하여 전기자장이 일어나자 함선은 점점 사라지기 시작해 
뱃머리만 약간 보일 정도였다. 
얼마 동안은 모든 것이 예상대로였지만 갑자기 선박에서 파란불이 번쩍 일면서 배 전체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불과 수초 사이에 함선은 약 400킬로미터 남쪽에 있는 버지니아주 노포크함 앞바다에 
수 분 동안 나타났다가 다시 필라델피아 해군기지 앞 바다에 돌아왔다. 
이번에는 모두 181명이 승선했었는데 그중 120명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으며, 
40명은 죽고 21명만이 살아남았다. 그러나 생존자 중 일부는 미쳐 버렸고 산 사람 모두는 
신체적으로도 매우 심한 이상 증세를 보였다. 그리고 가장 이상한 일은 그중 다섯 명이 
함선의 철판에 박혀 버려 철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애초 레이더망에 걸리지 않게 
하려던 실험이 뜻하지 않은 선박과 선원 전체의 텔레포테이션을 맛보는 사고로 끝을 맺은 것이다. 
이에 대해 해군 당국은 그런 실험을 한 일이 없으며,‘엘드리지’라는 함선이 없어진 일도 
없다고 주장하고, 그 함선의 일지를 공개하기도 했다. 
필라델피아 실험으로 당국과 실험 당사자들은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고 호기심 또한 커졌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우월한 무기를 가지려는 욕망이 이를 포기했을 리가 없다. 
알려진 바로는 미 해군이 1950년대에 ‘팀머맨(USS Timmerman)이란 함선으로 또다시 실험을 했으며, 
이번에는 엘드리지호 때처럼 400헤르츠를 사용하지 않고 1천 헤르츠를 사용했다고 한다. 
이 이론을 비행기에도 적용시키려는 노력도 있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라필(Stewart Raffill) 감독이 1984년에 만든 <필라델피아 실험>이라는 영화를 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는 1943년에 사라진 엘드리지 호의 두 수병이 
오직 전쟁중의 기억과 전혀 늙지 않은 육체로 1980년대에 오게 된다. 
이들은 1980년대의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회적, 정신적 고통을 겪기도 하며 이상한 일이 벌어져 
비밀연구당국(몬토크)에 알려지자 위험을 느끼고 도망가다가 결국 다른 차원에 있는 함선에 일종의 
블랙홀을 통해 되돌아가 아직도 가동되고 있는 발전기를 부수고 다시 지구로 돌아온다. 
이 줄거리는 꾸며낸 것이며, 그들은 그냥 4시간 동안 사라졌다가 돌아왔다는 설도 있다. 
하여튼 ‘필라델피아 실험’ 이라는 해프닝은 테슬라 혼자만의 이론으로 일어났던 일은 아니지만, 
그와 관계가 있기도 하고 첨단과학이 어떤 경지에 들어가고 있는지를 알리는 차원에서 소개해 보았다.


Posted by MAESTRO7
ETC2016. 1. 3. 20:21

[기타]'In hoc signo vinces'

 
 
'In hoc signo vinces'는 라틴어로 "이것(십자가)으로 승리하리라!" 라는 뜻입니다


Posted by MAESTRO7
ETC2016. 1. 3. 20:10

[유머]에미다...

며칠전에 사촌형과. 겜방에 갔습니다.. 
사촌형이 워낙 스타를 못해서 재미 없어진 나는.. 
채팅이나 하려구.. 인터넷에 들어갔습니다.. 
근데.. 거기에 
[몸매 불문, 얼굴 불문, 나이 불문 여자면 된다 나랑 잘사람] 
이라는 방이 있더군요.. 
전 사촌형 한테.. 이런 방도 있다면서 웃었습니다.. 
사촌형은 건전 사회 건설을 위해 불의를 못참는 공익 요원 
자리를 바꾸자고 하더군요.. 
난 형이 뭐하나 지켜봤습니다.. 
형은  대화명을  [니에미]로 하더니--;; 
그녀석 혼자 있는 방에 들어가더군요.. 
그녀석의 아이디는 꼴에 [정우성] 
[정우성] 하이 
누군가 들어와서 반갑게 인사했는데.. 
대화명을 보는 순간 당황했나 봅니다.. 
[정우성] "헉.."      아무말도 없더군요.. 
[니에미] 난 니 에미다 니눔아 여기서 뭐하는 거냐? 
[니에미] 니 에미라니깐.. 대답도 안할거냐 이눔아.. 
정우성은 두말도 안하고 짤라 버리더군요.. 
포기하지 않는 사촌형은 열혈 부산 남자임 
다시 들어갔죠.. 
[니에미] 야 이눔아 이제 니 에미를 쫓아내기 까지 하냐 
[니에미] 여기서 도대체 뭐하는 짓이냐 이놈아... 
[정우성] 아이 씨팔... 
  
역시 짤림 형은 대화명을 바꿉니다.. 
[이쁜희야]로 ... 그리구 다시 그방에 들어갑니다.. 
[정우성] 하이~ 방가~^^ 
[이쁜희야] 하이.. 
[정우성] 몇살? 
[희야] 아이.. 나이 상관 없다며.. 
[정우성] ^^ 방제 보고 들어온거예요? 
[희야] 응*^^* 수줍.. (으웨웨켁켁?) 
[정] ^^ 그럼 길게 얘기할거 없이 만날까? 전화기 있어? 
[희야] 응.. 있어 근데.. 정말 여자면 아무나 상관없어? 
[정] 응^^ 정말.. 
[희야] 진짜? 
[정] 진짜라니깐.. 
[희야] ^^ 근데 나 사실... 
[정] 왜? 못생겼어? 괜찮아... 
[희야] 아니.. 그런게 아니라.. 
[정] 그럼? 
[희야] 니.. 
[희야] 에미야.. 
[정] 헉--;; 
또 짤림... 
이 정도 되면.. 그만둘텐데  그넘은 계속 
꿋꿋하게 버티고 있더군요.. 
다시 대화명을 바꾸는 사촌형 [섹시걸]로.. 
다시 들어갔죠.. 
[걸] 하이~ 
[정] 하이~ 
[걸] 몇 살이야? 
[정] 25, 지금 어디야? 
[걸] 왕십리. 
[정] 어? 여기서 가깝네? 
[걸] 응.. 
[정] 대화명 보니깐.. 방제에 관심 있는거 같다? 
[걸] 응.. 그러니깐 들어왔지. 
[정] 그렇구나^^ 
[걸] 근데 너 키커? 
[정] 아니. 보통키야 
[걸] 몇인데? 
[정] 171.4 
[정] 싫어? 작아서? 
[걸] 아냐.. 그만하면 작진 않네.. 
[정] ^^ 그럼 우리 만날까? 
[걸] 응. 
[정] 니 핸폰 번호좀 불러줘.. 
[걸] 니꺼 부터 불러봐... 
[정] 01x-112-1234 
[걸] 너 본명이 정우성이야? 
[정] 아니.. 박쭝헉(가명,21) 넌? 
[걸] 난 01X-46x-468x야..(내꺼--;;) 
[정] 이름은? 
[걸] ^^ 근데.. 내 이름이 좀 웃기다.. 
[정] 뭔데^^ 
[걸] 에이.. 말하기 싫은데.. 
[정] 말해봐.. 
[걸] 니... 
[걸] 에미.. 
[정] ...... 
결국 지쳤는지 그넘이 나가버리더군요.. 


Posted by MAESTRO7
ETC2016. 1. 3. 19:54

[기타]백창우 - 소주 한잔 했다고 하는 얘기가 아닐세

소주 한잔 했다고 하는 얘기가 아닐세
울지말게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
날마다 어둠 아래 누워 뒤척이다 아침이오면
개똥 같은 희망 하나 가슴에 품고
다시 문을 나서지
바람이 차다고 고단한 잠에서 아직 깨지 않았다고
집으로 되돌아오는 사람이 있을까
산다는건 참 만만치 않은 거라네 
아차 하는 사이에 몸도 마음도 망가지기 십상이지
화투판 끗발처럼 어쩌다 좋은 날도 있긴 하겠지만
그거야 그때 뿐이지
어느 날 큰 비가 올지 그비에 
뭐가 무너지고 뭐가 떠내려 갈지 누가 알겠나 
그래도 세상은 꿈꾸는 이들의 것이지 
개똥 같은 희망이라도 하나 품고 사는건 행복한거야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고 사는 삶은 얼마나 불쌍한가
자, 한잔 들게나
되는게 없다고 이놈의 세상 
되는게 좆도 없다고 
술에 코박고 우는 친구야
- 백창우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 中> -


Posted by MAESTRO7
ETC2016. 1. 1. 20:48

[정보]엔진오일 교체 시기 정보

[정보]엔진오일 교체 시기 정보

 
오일은 무슨 일을 하는가?
 
자동차엔진이 더욱 강력하고 효율적이 되면서 윤활오일들 또한 그 요구조건에 적합하도록 재설계되어야 한다.
 
더 높은 엔진온도와 적어진 오일용량의 의미는 엔진오일이 과거보다 훨씬 더 열심히 바쁘게 재 역활을 수행해야 한다는것이다.
 
도데체 오일이 진짜 하는일은 뭘까?
 
물론  우리는 오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또한 부품들이 접촉하는 곳의 마찰력을 감소시키기 위해 미끈하게 만드는 작용을 한다는 일반적인 인식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외에 다른 무슨작용이 더 있지 않을까? 그렇다 훨씬 더 많은 할일이 있다.
 
1. 엔진오일의 역활
 
엔진이 적절하고 적당한 파워로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윤활작용으로 4가지의 주된기능을 행하여 한다.
 
1) 윤활역활을 해야한다.
 
차량오일은 마찰에 기인한 엄청난 힘의손실을 없애고 접촉하는 엔진부품이 서로 잘 돌아 갈수 있도록 부품에 윤활작용을 해주어야 한다.
 
특히 시동시에 이것이 매우중요하다. 엔진이 정지해 있을때 오일은 오일팬속으로 내려가려한다. 그러므로 엔진이 시동될때 크랭크가 엔진을 돌리기에 충분한 속도를 주기위해서 제빨리 오일들이 순환되고 펌프되어야 한다.
 
일단 엔진이 작동되고 나면 오일은 각구동부분을 미끄러지게 하도록 얇은 유막을 형성해야하며 이유막들이 파워와 성능과 효율을 증가시킨다.
 
각 다른 종류의 엔진들은 구동되는 동안 오일이 적절한 유막을 구동부품들에 제공하기위해 특정한 점도범위를 요구한다. 사람들은 30점도가 좋은 보호작용을 한다면 50점도는 더 높은 보호작용을 해야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엔진이 50점도에서 운행하도록 디자인 되지 않았다면 50점도를 쓰느것은 엔진의 마모를 막아줄수는 있으나 오히려 엔진온도의 상승을 초래할수 있다. 이것이 엔진의 마모가 증가되는것 만큼 엔진의 수명에 악영향을 줄수있다.
 
2) 엔진을 보호해야 한다.
 
오일이 금속표면에 만들어 내는 유막은 단순한 윤활작용 이상의 일을한다.
엔진부품들이 서로 접촉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오일은 마모에 대한 보호역활을 한다. 이작용은 분명한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일이 막아주는 또 다른것이 있다.
 
오일은 엔진구성품의 부식을 막아야한다. 응축과 연소작용에 의한 오일의 산화와 오염은 오일내부에 산성화를 일으킨다. 만약 이러한 산들이 엔진부품과 접촉하게 된다면 부식이 발생하며 그결과로 부품의 조기파괴현상이 일어난다. 엔진오일은 이러한 산과 싸우도록 디자인 된것이다.
 
3) 엔진을 깨끗하게 해야한다.
 
엔진이 깨끗하게 유지되지 않눈다는면 효율성이 떨어진다. 엔진내부의 침전물들은 원활한 작동을 방해하고 엔진의 성능을 저해하면서 연비를 감소시킨다.
 
게다가 보호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는 오일내의 오염물질은 엔진내에 셀수없을 정도로 많은 마모를 일으킬수 있다. 차량의 따라 5~20마이크론보다 큰입자들은 제대로 제거되지 않으면 엔진에 심각한 피해를 끼칠수 있다.
 
이것이 얼마나 작냐면 인간의 머리카락 굵기가 100마이크론이다. 물론 필터작용이 큰역활을 하지만  오일역시 오염물이 오일필터에서 걸러질때까지 오연물질을 부유물 형태로 만들면서 엔진내부에 침전물로 가라앉지 않도록 해 주어야 한다.
 
4) 냉각작용을 해야한다.
 
엔진오일은 엔진내의 냉각작용에 큰 역활을 한다. 라지레터는 엔진의 상부부분을 냉각시키는 작용만 할뿐이다. 나머지부분 (크랑크샤프트.캠샤프트.타이밍기어.피스톤.메인로드베어링.커넥팅로드베어링과 다른 엄청 중요한 부품들은 주로 엔진오일에 의해서 냉각된다)
 
열은 연소작용과 부품의 마찰작용 때문에 엔진내부에서 일어난다. 오일이 내부를 지날 갈때 내부의 열을 오일팬으로 이동시킬목적으로 오일은 뜨거운부품으로직접향하게 된다. 바로 이작용을 통해서 열이 팬주위를 감싸는 공기중 사라지게 된다.
 
 
오일안에는 무엇이 들어가 있나?
 
여러분이 오일에 대해 공부 할것이라면 기초부터 시작하는것이 이치에 맞다.
 
1. 오일은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  
2. 무슨 성분이 사용되는가? 
3. 석유(광유)계 오일과 프리미엄급 합성유의 차이는 무엇인가?
 
1. 주요성분
 
오일에는 두가지 주성분이 있으며 베이스오일과 첨가제이다.
베이스오일은 오일의 대부분을 구성하며 첨가제는 베이스오일의 장점을 강화시키고 모자랄수 있는 부분을 채워주기 위해 사용된다.
 
2. 베이스오일(기유)
 
베이스오일은  석유(광유)계와 합성유 두가지이며 석유계 베이스오일은 원유에서 정제된 형태이고 엔진오일이 처음 생산된 이래라 자동차 윤활유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합성베이스오일은 반면 윤활의 목적만으로 실험실에서 화학적으로 탄생한다.
이 합성베이스오일은  정제를 통해서 제거되야하는 오염물자체를 포함하지 않은 합성물질로 부터 만든다. 
 
이것은 1900년대부터 존재했으나 70년대가 되어서야 자동차용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3. 석유계베이스오일(석유계 기유)
 
위에서 언금한것 처럼 석유계 베이스오일은 지하에서 캔 원유를 정제한것이다.
일단 오일이 캐어지면 만족할만한  윤활성능을 가지기 위해 일련의 정제과정을 거쳐야한다.
 
1) V.I 점도지수
 
여러 온도범위에서 점도를 유지하는 능력을 측정하는것과 숫자가 높을수록 온도변화에 따라 덜 점도가 변하며 좋은오일일수록 일반적으로 더 높은 점도 지수를 가진다.
 
2) 저온성능
 
저온에서  잘 흐르수록  저온에서의 성능또한  더 좋으며 저온성능이 추운날씨에서 시동시 즉각적인 엔진보호작용을 해준다.
 
3) 고온성능
 
엄청나게 뜨거운 조건하에서 얼마나 잘 오일이 견디는가이다. 쉽게 타버릴까? 점도상실로 금속부품끼리 부딪히도록 허용할까? 분면히 더 좋은오일일수록 고온에서 더 효과적으로 견딘다.
 
4) 산화저항성
 
산화는 슬러지와 침전물을 생성시키는 오일성분들이 산소와 반응할때 발생하며 산화는 엔진내부에 오일의 점도를 올라가게하여 순환이 어렵게 하며 오일은 산화성에 저항할수 있어야한다.
 
5) 정제과정
 
최종 베이스오일로서의 자질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원유는  일련의 정제과정을 거친다 
 
베이스오일 정제과정
 
1. 염분제거
 
차후의 정제과정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원유로부터 연분오염 물질을 제거 
 
2. 부분적인 증발과정
 
원유는 다른 끊는점을 가진성분을 모으기 위해서 증기실에서 가열된다.
윤활용 베이스오일은 아스팔트물질을 포함하지않은 가장높은 끊는점의 성분이다.
 
3. 진공증류
 
윤활용 베이스오일을 각기 다른 분자무게와 점도로 분리시키는 과정
 
4. 솔벤트 추출(녹이는물질.유기용매)
 
솔벤트는 증류과정에서 얻은  각각의 부분들에 첨가되며 그 혼합물은 향이나는 화합물과 향이 없는 화합물로 안착되며 그중 향이 나는 화합물은 다음단계로 진행되기전에 베이스스오일에서 추출된다.
 
향있는 화합물의 약 80%가 이방법으로 제거되며 이것은 오일의 열역학적 산화안정성을 크게 높이고 베이스오일의 점도지수 또한 상당히 높인다.
 
5. 왁스제거
 
왁스는 저온 유동성을 향상시키려 제거되며 저온에서 왁스물질은 결정화하여 오일을 뻑뻑하고 순환하기 힘들게 만든다.
 
메틸에틸케톤(MEK)가 첨가되고 오일은 목표하는 흐름점 바로 아래까지 냉각되며 이때 생긴 모든 왁스결정체가 여과를 통해 제거된다.
 
6. 수소마감처리 또는 점도처리
 
이방법은 좀더 프리미엄급 석유(광유)계 베이스오일을 만들기 위한 선택적으로 사용되며 수소마감처리는 수소와 가열된 오일이 통과하는 촉매판을 사용하게되고 이러한 성분들이 촉매판을 지나 가면서 황성분과 질소가 걸러지게 되며 점도처리도 다른방법을 사용하여 위의 결과를 얻는다.
 
이 처리들이 산화안정성 열역학적인 안정성과 베이스오일의 색상을 향상시킨다.
 
7. 수소처리법
 
몇몇 경우에 일반적 수소마감처리에 더하여 좀더 가혹한 방법을 사용하며 수소처리법은 촉매가 있는상태에서 오일을 극도의 고온과 고압과정을 통하게 하는것이다.
 
이것은 잔존하는 향있는 탄화수소 물질을 사용 가능한 향이 없는 탄화수소로 바꾼다. 결과적으로 나온 탄화수소분자들은 훨씬 더 안정적이고 베이스오일이 오염물질을 거의 포함하지 않게 되는것이다.
 
이 과정은 솔벤트 추출법에서 향제거로 사용될수 있으며 더 효과적이고 약 99%의 방향물질제거를 이룰수 있으며 오직 수퍼 프리미엄급 베이스오일만이 이방법을 이용한것이다.
 
8. 마무리
 
원유는 생산지에 따라 품질 및 오염물질 함유가 다르며 위의 정제과정이 많은 작용을 한다. 따라서 석유계 베이스오일은 그품질이 천차만별이다.
 
이런품질의 차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오일회사는 원유를 고르는데 엄청난 신중함을 보여야 하며 정제과정도 엄격한 품질관리하에서 실시되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이런 품질관리를 위해 신경을 쓰는 회사들은 브랜드오일이네 하여 가격이 비싼이유이겠죠..
 
제품통에 써있는 API 규격은  품질을 뜻하는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요구조건을 만족한다는 표시이다.
 
1. Polyalphaolefins (PAO's=파오) 
미국과 유럽에서 합성베이스오일로 가장 흔하게 쓰이는 것이다. 많은 제품들이 오직 PAO 만을 쓴다. 
PAO는 합성화된 탄화수소라고도 불리며, 왁스와 금속, 황과 인을 전혀 포합하지 않는다. 
PAO제품의 VI(점도지수)는 거의 150이며, 영하40도(화씨)의 극도의 낮은 흐름점을 가진다. 
PAO가 아주 열역학적으로 안정되긴 하지만, PAO 베이스오일을 쓰는데 있어서 몇 가지 단점이 있다. 하나는 다른 합성 유만큼 산화적으로 안정하지 못하지만, 적절히 첨가제가 보충되면, 산화안정성이 이루어진다. 
 
PAO는 70년대에 발견된 용기(씰링)를 수축시키는 경향이 있다. 
 
2. Diesters(디에스테르) 
 
덜 일상적으로 사용되며, PAO와 비슷한 이점을 준다. 하지만, 구조상 더 다양화되어있다. 그러므로 성능 또한 PAO보다 여러 등급이 나올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중하게 선택하면, 디에스테르는 일반적으로 파오보다 더 낮은 흐름점을 갖는다.(약 화씨 -60 ~ -80) 그리고 적절하게 첨가제가 보충될 때 약간 더 산화적으로 안정적이다. 
디에스테르는 또한 타고난 용매 특징이 있어, 깨끗하게 탈뿐만 아니라, 다른 윤활유에 의해생긴 침전물을 없애준다.(세정 첨가제 없이도) 
 
PAO처럼 디에스테르도 봉인에 영향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부풀게 만든다. 화학적으로 내성을 지닌 봉인이 요구된다. 
 
3. Polyolesters (폴리올에스테르) 
디에스테르와 유사하지만, 약간 더 복잡하지만 디에스테르보다 흐름점과 VI가 제품에 따라 차이가 많이 날 수 있다. 하지만 몇몇 폴리에스테르 베이스오일은 화씨-90의 흐름점을 가짐으로 디에스테르를 능가하고 점도지수 향상제의 도움 없이도 점도지수가 160정도 된다. 
 
디에스테르처럼 똑같이 용기에서 부푼다. 
 
다른 합성베이스오일도 있지만 자동차에는 위의 세 가지만큼 넓게 사용되지는 않는다. 많은 합성유들이 PAO와 몇 가지 첨가제를 결합한 중급정도의 품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PAO베이스오일이 다 똑같은 것은 아니며 최종적인 윤활성능은 베이스오일을 만들 때 생긴 화학반응에 달려있다. 
 
프리미엄급 합성유는 한 종류 이상의 PAO를 혼합하거나 디에스테르나 폴리에스테르를 섞어 각각의 장점을 합치기도 한다. 
 
이러한 작업은 엄청난 경험과 전문성을 요한다. 결과적으로, 그런 베이스오일 혼합과정은 합성윤활유 산업에서 보기 힘들고, 매우 숙련된 회사에 의해서만 행해진다. 
 
게다가, 그런 혼합이 고품질 합성유를 만들지라도, 싸지가 않다. 이런 오일들은 다른 오일들이 3~4달러 할 때, 6~9달러나 나간다. 말했다시피, 투자한 만큼 받는 것이다. 
 
 
[오일의 구성]
엔진오일이던, 미션오일이던 모두 기유와 첨가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기유는 오일자체의 주성분으로 70%~90% 차지하며 첨가제는 10%~30% 차지합니다
[합성유의 정의]
합성유란 기유부분이 합성기유로 되어 있는 것을 합성유라고 합니다
합성기유는 전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기유표가 있으며 이를 토대로 알수 있습니다
[기유표]
1기유: 원유에서 뽑은 기유원료를 정제를 하고 사용하는 기유, 저급의 기유
2기유: 1기유를 다시한번 정제해서 사용하는 기유, 대부분의 오일기유에 해당
3기유: VHVI라고도 부르고 각회사마다 조금씩 다르게 부름, 2기유를 다시한번 수소
         첨가개질해서  고도로 정제해서 만든 고급기유, 우리나라가 세계 1등이며 주요 생산회사는 SK, S-OIL, 곧 GS도 개발예정임 SSU EURO XT 5w40이 3기유로 만들어진 대표적인 오일
4기유: PAO라고 불리우며 4기유부터 5기유를 합성기유라고 함
         일반적인 1기유부터 3기유 제조공정과는 완전다르며 화학공정에 의해 만들
         어지는 초고도로 정제하여 만든 기유
         세계에서 생산되는 회사도 몇군데 안되며 기유자체가 3기유보다 몇배 비싸
        므로 오일가격이 비싸다
        과학적으로 PAO가 다른기유보다 뛰어난 성능을 나타낸다는 것은 확실하며 
         다만 가격이 비싸고  제조회사가 적으며 공급보다 수요가 많다
5기유: ESTER (다른것도 몇종류 더있음)라고 흔히 불리우며 인간이 만들어 낼수
         있는 최고의 합성기유, PAO보다도 몇배 비싸며 전세계에서 만드는 회
         사도 거의 없으며 수량도 매우 적게 생산되며 공급보다 수요가 훨씬많
         아서 항상 부족한 기유
         가격이 너무 고가인 점만 빼고는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는 기유, 
 
[합성유의 정의 보충]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합성유란 합성기유로 만들어진 오일을 말합니다
합성기유는 PAO, ESTER 등이며 두가지를 서로 혼합해서 사용하기도 합니다
 
엔진오일에도 급이 있다
순정 엔진오일과 합성유의 사이에는 ‘광유 > VHVI > XHVI > PAO > Ester’ 순으로 등급이 매겨져 있다. 쉽게 설명하면 VHVI 기유는 광유를 따로 분리해 더 정제한 급이고, XHVI 기유는 VHVI 급을 다시 정제한 오일로 보면 된다. 주요 브랜드로는 SSU EURO XT 5w40, 지크 XQ, 킥스파오(Kixx PAO)가 XHVI 기유로 만들어진 대표적인 오일로 꼽는다. 그 다음 단계는 LPG와 가솔린 사이에서 정제한 PAO급 오일이다. 아랫단계의 광유나 XHVI기유 보다 내구성, 냉각능력, 고열에서 점도를 유지해주는 능력이 훨씬 뛰어나다. PAO급 브랜드로는 디비놀, 아집, 아랄, 모튤 제품들이 여기에 속한다. 여기까지가 원유에서 뽑아낼 수 있는 베이스 오일들이다.
진정한 합성유의 강자 에스테르 기유
최상급 식물성 기름을 원료로 한 에스테르 기유가 합성유 꼭지점에 위치해 있다. 가장 보편화된 제품으로는 ‘모튤 300V’가 있으며, 100% 합성유(Full synthetic mortor oil)란 이름을 제품에 표기 할 수 있다. 에스테르(ester)란 식물에서 나오는 기름을 추출해 만들어진 최고급 엔진오일이다. 그 어떤 오일보다 내구성, 단열성, 열을 버텨내는 능력, 슬러지 억제 효과가 뛰어나다. 에스테르가 나온 지 오래됐지만(1980년대) 식물에서 추출되는 양이 많지 않아 항공기, 우주선 등 극악조건의 기계 장치에 사용 됐다. 최근에는 그 우수성이 입증돼 자동차에 쓰이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제품이 파워클러스터 레이싱, 파워클러스터 빌렌자, 레드라인, 뉴텍 등으로 이런 제품들은 토크나 마력 상승 등을 꽤할 수 있는 제품들이다. 
Side information 
순정엔진오일 V/S 합성유 특징
순정 엔진오일 이렇습니다
순정엔진오일이라고 말하는 광유도 일반적으로 윤활을 목적으로 사용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자동차 엔진의 특성상 지속적인 폭발 행정에 따른 열기로 인해 변형이 쉽게 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또 피스톤 간 심한 마찰열은 슬러지 생성과 카본이 만들어져 엔진에 때가 끼는 현상으로 진행되는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 다만, 합성유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이 장점인데, 이런 점을 활용해 교환주기를 빠르게 가져간다면 비교적 엔진관리에 도움을 줄 수 있다. 
합성유 엔진오일 이렇게 다릅니다
일단 합성유는 우수한 내열 안정성을 꼽을 수 있고, 고온에서의 점도를 유지하는 성능이 탁월하다. 또 저온에서도 높은 유동성을 가지고 있어, 시동성능이 탁월할 뿐만 아니라, 한겨울 혹한기에도 완벽한 윤활성과 흐름성을 발휘해 엔진 내부의 저항을 감소시킨다. 특히 여름철 고 하중의 운전에도 유막이 파괴되지 않는 특별함과 오일이 쉽게 증발하거나 소모되지 않는다. 또한 마찰로 인한 마모방지, 연비향상, 엔진의 냉각효과 슬러지 사전생성 방지 등을 자랑한다. 다만, 광유대비 가격이 2∼3배 이상 비싸다는 것이 흠이다.
 
합성오일 VS 석유계오일
 
오일은 자동차엔진의 피와 같은 것이다. 엔진오일 없이는 골목길 끝으로 가는 것조차 힘들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전통적인 석유계 오일들은 모든 탈것에 적당한 보호기능을 해왔다. 
 
핵심단어가 있다 
적당한.... 석유계 오일은 대부분 엔진이 망쳐지는 것을 막는데 에 적당한 역할을 해왔다. 자주 교환한다면, 특별한 엔진 문제없이 20만Km 이상 차는 달릴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물음은 이렇다
왜 여러분은 30년 이상이나 더 좋은 제품이 판매되고 있는데 "적당함"에 안주하려고 하는가? 
 
여러분의 정비사에게 단순히 망가지는 것만 막아달라고 하는가, 아니면 멋지게 계속 달리는 것은 원하는가? 이 책을 읽고 있다는 것은 바로 후자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차량에서 최고의 성능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다. 
여러분은 차량에 돈을 투자했다. 2000만 원 이하의 차를 사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적당한 성능을 위해서 내기에는 큰돈이 아닌가? 
 
오늘날의 엔진은 더 나은 성능으로 개발되었다. 그리고 석유계오일이 10, 20년 전보다 향상된 보호능력과 성능으로 제작됨에도, 아직 처리되어야 되는 문제가 상당하다. 
 
요즘 엔진은 고성능 윤활유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합성오일이야 말로 거기에 가장 합당한 제품이다.
 
왜 석유계 오일은 불충분한가? 
 
전통적인 석유계오일은 정제과정을 거친 물질로부터 생산된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차량에는 사용하기에 불충분하다. 
 
석유계 베이스오일은 왁스성분, 황, 질소, 산소, 수분, 염분, 그리고 금속성분을 포함하고 있다. 이 불순물들은 윤활유에서 정제되어 제거되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아무런 정제과정도 완벽하지는 않다. 불순함은 항상 처리과정에 존재한다. 
 
또한 불순물을 제거하기위해서 반복된 정제과정을 통하는 것도 경제적이지 못하다. 
만약 반복을 한다면, 합성유 가격만큼 비용이 나갈 것이다. 
 
따라서 석유계 베이스오일에는 엔진을 보호하는데 전혀 필요 없는 물질이 포함되어있다. 
 
그 물질들은 오일의 윤활특성을 강화시키는데 아무런 작용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일과 엔진에 해를 끼칠 뿐이다. 
 
1. 변성을 일으키기 쉽다. 
 
몇몇 전통 석유계윤활유내의 화학물질은 엔진의 정상작동온도에서도 화학적인 변성이 잘 일어난다. 
 
다른 윤활유는 산소가 있을 때만 정상온도에서 화학적 변성을 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항상 있는 일이다. 산소가 석유계 베이스오일내의 오염물질로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열역학적, 산화적으로 불안정한 오일물질은 윤활작용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 물질들은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너무 비싼 비용이 나가기 때문에 석유계오일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열역학적, 산화적인 변성이 일어날 때, 엔진부품들은 니스, 침전물, 슬러지로 뒤덮이게 된다. 
 
또한, 남겨진 윤활유는 뻑뻑하여 펌핑하기가 힘들고, 열전달 능력을 손실하게 된다. 
 
 
2.  불충분한 저온 시동성 
 
게다가, 석유계오일은 추운날씨에 엄청난 오일의 뻑뻑함을 일으킬 수 있는 파라핀을 함유한다. 
 
흐름점 강하제의 첨가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석유계오일은 합성유보다 8~22도 더 따뜻한 온도에서 뻑뻑해지기 시작한다. 
 
결과적으로 석유계 윤활유는 추운날씨에 엔진내부를 재빨리 순환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때, 엔진은 시동과 동시에 몇 분간 부품이 무보호상태로 남게 된다. 
 
분명히, 엄청난 마모가 이 시간동안 일어날 수 있다.
 
3. 최저의 열조절능력 
 
모든 조건이 전통엔진오일이 작동하기에 완벽한 상태일 때도, 이 오일들은 합성오일에 한참모자란다. 
 
전제과정을 통한 석유계오일은 분자크기가 가지각색이다. 
 
오일이 윤활시스템을 통해 흐를 때, 작고 가벼운 분자는 오일흐름의 중앙에서 흐르고, 반면에 무거운 분자들은 부품에서 오일로 전달하는 열기를 막는 장막을 형성하게 되는 금속표면에 붙게 된다. 
 
효과적으로 크고 무거운 분자들은 뜨거운 부품을 감싼 담요 같은 역할을 한다. 
또 그들의 성능을 가소시키는 분자의 불균일성으로 인한 다른 영향이 있다. 
균일하게 부드러움을 가진 분자들은 상대적으로 편하게 서로를 타넘게 된다. 
이것은 크기가 달라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다. 
 
이론적으로, 구승을 다른 구슬꼭대기에 올려놓는 것과 비슷할지 모르겠다. 
만약 구슬이 똑같은 크기라면, 그것들은 상대방을 쉽게 건너갈 수 있다. 
하지만, 모두 다른 크기라면, 결과는 훨씬 비효율적일 것이다. 
 
석유계오일에서, 이런 분자들은 비효율적으로 엔진내부의 마찰을 증가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석유계오일은 아직 최소한의 열 조절역할만을 할 수 있다. 
석유계 오일능력이 차량의 엔진 냉각에 거의 50%밖에 안 됨을 고려해볼 때, 이것은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니다. 물론 이미 추측했으리라 믿는다. 
 
일반광유와 합성유로 길들이기 한 차량의 사진
 
일반광유로 약 100,000km주행한 프라이드 웨건의 헤드 사진이다. 일반광유의 성격으로 왁스성분이 금속들을 마모시키고, 연료가 연소하며 생기는 카본, 슬러지, 검 등의 오염물질이 과다 생성되며 엔진 내부에 착상되어 심하게 오염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합성유로 길을 들여 약 160,000km주행한 쏘나타3의 헤드 사진이다. 합성유의 품질마다 다소 차이는 있겠으나 기본적인 청정분산제의 역활로 엔진의 깨끗한 상태를 확인활 수 있다. 또한 합성유에는 왁스성분이 0%이기 때문에 금속 마모분이 월등히 감소하며, 높은 윤활성과 냉각작용으로 엔진을 보호한다. 또한 압축압력이 좋기 때문에 블로바이가스가 감소하고, 이는 블로바이 가스에 포함된 오염된 오일의 제 유입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역할도 함께 수행한다. 
 
 
 
출처 엔진오일사랑
 
 
 
 
ps
전에 킥스파오는 pao기유아니라고 절대 그가격에 안팔거라고 적은적있었는데 
역시나 석유계합성유였군요 
렙솔,토코100%합성유는 XHVI기유임
 
그리고 싸다고 거대유명회사아닌(렙솔,모빌,모튤,엘프같은 회사)어디서 많이 못들어본회사들은
100%합성유라고해서 제조해도 기술력이 안되서 정제기술이 그지같다고함
 
광유로 갈아줘도 전혀 문제될건 없음 티도 안남 
그러나 위의 말대로 화석바이크될정도로 수명을 보장못함
대부분 `1~2년 소유하면서 광유갈아주고 "난 광유로 관리합니다. 전혀문제없어요~"
1~2년안에 퍼지는차면 중국산만도 못한것임
광유도 오일이기때문에 윤활작용을 하는것임 허나 엔진까보면 후덜덜시츄에이션
 
바이크는 차량과 비교도 안될정도로 고온 고rpm을 사용하기때문에
더높은 오일의 능력을 요구함
또한 배기량이 낮은 바이크의경우 오일량이 적기때문에 산화시기도 빠름
바이크의 적정기어변속rpm이 자동차에선 레드존에 해당함
광유로 타건 합성유로 타건 자기마음이지만
광유로 5000km타도 상관없다고 초보자들에게 추천은 하지말았으면함
그렇게 관리하던 차들이 돌고돌아 가져온지 얼마만에 피스톤나가고 미션나가고
엔진주요부품 다 망가져버리니 또 자기차량이 무슨문제가 있는줄도 모른체
그냥 다른차도 이러거니해서 문제점도 모른체 엔진짱짱하다고 팔아제끼는차들이 
수많음!
자기가 평생탈거 아니면 또다른 라이더를 위해서 
1000원~10000원씩 피같은돈 저금해 중고바이크산사람들 눈에 피눈물나게 하지맙시다
 
 
 
엔진오일 딱 맞게 교환하는법!!!!
 
평소 운행하던대로 타면서 전에 갈던킬로수에 전문바이크대리점에 가서 점도체크를 부탁한다
아직 더 운행해도 된다 싶으면 200~300km를 더운행후 확인해본다 
그래도 멀쩡하다면 약간씩 늘린다. 
평소타던대로 오일점검시 엔진오일부족이나 점도가 죽거나 오일이 타버렸을경우는
전에 타던 킬로수보다 200~300km 정도 적게타고 갈아준다
줄여도 동일하다면 더 줄이면 된다.
 
바이크 운행습관에 따라 천차만별인 주행거리가 나오기때문에
각 오너마다 체크를 해서 최적일때 갈아주는게 좋을듯보입니다.
그리고 점도는 손이나 눈으로 봐선 측정할수 없습니다.
[출처] 엔진오일 공부합시다. (바이크&튜닝매니아[오토바이][스쿠터]) |작성자 유카링고


Posted by MAESTRO7
ETC2015. 2. 12. 11:36

1. 
1431년. 함길도에서 일종의 기생충에 대한 목격담으로 보이는 기괴한 사건이 보고 되었다. 


한 여자가 남자를 저주하기 위해, 뱀 모양의 그림을 넣어 놓은 이상한 음식을 남자에게 먹였다. 
 이후 남자는 갑자기 복통을 느끼며 괴로워 했다. 
남자의 복통을 치료하기 위해 약재로 사용하는 곰취 뿌리를 남자에게 먹였더니, 
남자의 배에서 뱀과 꼭 닮은 모양의 이상한 것이 세 마리가 나왔다. 
이 뱀들 중에 두 마리를 죽이고 한 마리를 개에게 먹여 보았는데, 
그러자 개는 3일만에 죽어 버렸다. 정황을 살펴보기 위해 개를 해부해 보았더니, 
뱀은 개의 뱃속에서 그때까지도 살아 남아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사건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몰라서, 관청에서는 상황을 정확히 조사하기 위해 모든 관련된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고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조사를 아무리 진행해도 알 수 없는 일 투성이어서 
마냥 사람들을 감옥에 가둬 놓고 긴 시간 동안 방치하게 된다. 
결국 사람들은 의미 없이 감옥에 끝도 없이 갇혀 있으면서 조사 당하는 것에 
고통을 느꼈는지 대부분 감옥에서 목을 매어 자살해버린다. 









2. 
조선 시대에는 범죄를 수사한 후 그 범죄를 증명할 때에 범인의 "자백"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았다. 
때문에 자백을 받기 위해 범인을 고문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기본적인 고문 방법은 나무 몽둥이로 때리는 것과 채찍으로 치는 것이었다. 
비위생적이고 몸을 가누기 어려운 감옥에 몇날 며칠이고 가두어 놓으면서 사람을 치게 되면, 
고통이 커서 거짓 자백하게 되는 일이 많았고, 고문 중에 사람이죽는 일도 비일비재 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 내내 고문을 심하게 하는 것의 위험함을 지적하는 의견이 조정에 계속 제시되었다. 
그리고 고문 방법을 적절히 조절하는 것에 대한 논의도 많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실상은 얼굴에 문신을 새기거나, 
사람을 매달아 놓는 도가 지나친 고문 방법도 자주 사용되었으며, 
주리를 틀거나, 무거운 돌로 짓눌러 다리 뼈를 부수는 고문도 종종 이루어졌다. 


1608년. 온양의 8, 9개 마을에서 10여명의 사람들이 난데 없이 
 군인들에게 붙잡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잡혀온 사람들은 자신들이 잡혀온 이유 
곧 반란을 꾸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잡혀온 사람들은 반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평범한 주민들이었으므로 크게 당황하게 된다. 
사연인즉슨, 당시 온양의 군수였던 이질수(李質粹)가 우연히 활을 제조하는 
기술자로부터 항간에 떠도는 헛소문을 들은 것이 발단이었다. 
온양에서 반란을 도모하는 무리들이 있다는 것은 막연하게 넘겨 짚는 생각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질수는 반란을 하는 무리들을 체포하면 큰 공을 세우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에 도취되어 버린 것이었다. 
이질수는 정확히 사실을 파악하기도 전에 충청도 감사 이용순(李用淳)에게, 
 자신이 반란을 꾸미고 있는 무리들을 잡을 것이라고 보고해 버린다. 


상부에 보고를 하고 대충 짚히는 사람 10여명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었지만, 
이질수는 그제서야 자신이 허무맹랑한 뜬소문을 잘못 넘겨 짚고 일을 벌인 것임을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이미 "반란을 꾸미는 무리들이 있다"는 엄청난 보고를 올린 마당에 자신이 헛소리 한 것이라고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반란이라는 엄청난 사건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가 부주의하게 잘못된 사실을 퍼뜨리고 
무고한 사람을 체포한 일이 되어 버리면 안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승진하는데 큰 얼룩으로 남을 일일 뿐만 아니라, 그 때문에 처벌을 받을 가능성도 컸다. 
이질수는 결국 어떻게든 체포된 사람들이 정말로 반역을 꾸민 범죄자로 꾸며야 했다. 
이질수는 붙잡은 사람들이 진짜 범인이기를 간곡하게 바랬기에 
스스로 자신이 체포한 사람들이 반역자임에 틀림없다고 자꾸만 스스로 되뇌이면서 믿었던 듯 하다. 


그러나, 잡혀 있는 사람들로서도 없는 사실을 실토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반란을 꾸민 죄는 처벌이 사형 밖에 없으며 
그 처형 방식도 매우 잔인했기 때문에 보통의 고문 방법으로는 범죄에 대한 인정을 하기 어려웠다. 
이때문에 이질수는 새로운 고문 방법을 사용하게 된다. 
이질수는 잡혀온 사람들을 감옥에서 꺼낸 뒤 철로 되어있는 기묘한 크기의 솥 앞에 앉혀 놓았다. 
 그리고 그 솥에 불을 지펴 벌겋게 솥을 달구면서, 
잡힌 사람들에게 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달군 솥을 머리통에 뒤집어 씌우겠다고 한 것이다. 
죄가 없는 사람들이 만족할만한 답을 하지는 않았고, 
이질수는 달군 솥을 머리에 씌워 버렸다. 사람은 고통스럽게 죽어나갔다. 
이런 방법으로 이질수는 사람들을 차례로 죽여나갔다. 


이질수는 반쯤 미쳐서 고문을 계속 진행해나갔다. 
그런데, 고문을 진행하던 도중 맑은 대낮에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면서 비가 쏟아졌고, 
불이 꺼지고 솥이 빗물에 식게 되어 고문을 계속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그제서야 이질수는 크게 겁을 먹고 허겁지겁 고문을 중단했다. 


상황이 무시무시하게 돌아가자, 이질수는 당황한다. 
당시 이질수는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고 신분을 위조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들을 체포하기 위해 닥치는대로 마을들을 헤집고 다니기도 했다. 
이질수는 신분을 위조한 사람들을 쫓아다니다가 조사하게 되는 민가의 주민들을 심하게 괴롭혔고, 
나중에는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는지, 이질수 스스로 애꿎은 민가의 재물을 범죄와 연루된 것이라고 
몰아 붙이며 약탈하며 다니게 된다. 
결국 나중에는 온양 인근 사람들이 짐을 싸서 피난을 떠날 준비를 하기에 이른다. 


이질수가 가두어 두고 고문했던 사람들 중에 살아 남았던 사람들은, 
이 사건을 서울 조정에서 직접 관할하게 되면서 대부분 죄가 없는 것으로 풀려나게 된다. 
이후 조정에서는 온양 일대의 민심이 흉흉해진것을 바로 잡기 위해 특별히 승지를 파견하여 상황을 추스리게 하였다. 
한편 모든 사건의 중심이었던 이질수는 1609년 1월 3일 지평이었던 한찬남(韓纘男)의 건의로, 파직되어 자리에서 쫓겨 나게 된다. 









3. 
1461년에는 갑산(甲山) 지역의 군사(郡事)로 재직하고 있던 정희문(鄭希文)이 살인을 저지른 후 감옥에 갇혔다. 
그런데 정희문은 감옥에서 탈출 했다가 현감으로 있던 진치화(陳致和)에게 다시 체포되었다. 
체포된 정희문이 모든 사실을 자백했는데,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진치화는 정희문의 발바닥을 몽둥이로 때리는 고문을 했다. 
이에 정희문은 화가 나서, 진치화가 자신에게 가하는 고문이 부당하다고 지적한 뒤에, 
진치화가 관청의 재산을 횡령하여 서울의 본가로 몰래 보낸 사실을 말하면서 욕을 한다. 
 진치화는 여기에 광분하여, 정희문의 가족들을 잡아 가두고, 
정희문의 입에 재갈을 물린 뒤에, 잘 드는 칼로 온몸의 살을 조금씩 조금씩 긁어 내는 잔인한 고문을 가해버린다. 


1678년에는 이인한(李仁漢)이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인 김제원(金悌元)에게 빚 독촉을 했다. 
그런데 빚 독촉에 시달리던 김제원이 도주해버리자, 
이인한은 김제원 대신에 그 아내인 귀영(貴英)을 붙잡는다. 참봉 벼슬을 지낸 적이 있었던 부유한 사람이었던 
이인한은 자기 집 안에 사람을 가둘 수 있는 곳이 있었다. 이인한은 바로 이곳에 귀영을 감금했다. 
이인한은 이곳에 귀영을 한 달 이상 감금하면서 계속 채찍으로 때리며 고문하였다. 귀영이 결국 그대로 죽어버렸고, 
이인한은 부하들을 시켜 죽은 귀영의 목을 줄로 묶어서 목 매달아 죽은 것처럼 위장한 뒤에 도성 밖에 시체를 버렸다. 


죽은 귀영의 모친이 귀영이 실종된 후 시체로 발견 되자, 이인한이 의심된다고 신고하여 조정에서는 이인한을 조사하게 된다. 
그러나 이인한은 조정의 주요 세력가들과 친분이 있었으므로, 고문을 당하지 않았고, 
이인한의 부하들만 고문을 당했다. 
고문 과정에서 이인한의 부하들만 목숨을 잃었다. 이것이 부당하다 하여 많은 논쟁이 있었으나, 
영의정(領議政) 허적(許積)이 이인한을 비호했으므로, 
이인한은 결코 같이 조사 받지 않았다. 이인한은 은 10냥을 벌금으로 내는 정도의 처벌을 받게 되나, 
그마저 후에 사면 받게 된다. 









4. 

조선시대에는 종, 곧 "노비"라는 신분이 있었다. 종은 주인의 소유물로 취급되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주인을 섬기고 복종해야 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물론 종도 사람이었기 때문에 종이라고 해도 함부로 죽이면 큰 죄로 처벌되었다. 
하지만, 반대로 종이 주인을 배반하는데 대해 주인이 처벌을 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졌고, 
종종 도가 지나치게 주인이 종을 처벌하는 일들이 문제가 되었다. 


1488년. 세력가였던 유하(柳河)의 아들 중에 유효손(柳孝孫)은 자신의 종이었던 효양(孝養)과 강제로 동침하려 하였다. 
효양은 유효손을 계속해서 거부하며 피했다. 이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 유효손은 
이것은 종이 주인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에 해당한다고 하면서, 
그에 대한 처벌을 가하기 위해 효양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유효손은 
먼저 효양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꺾어 부러뜨려서 효양에게 고통을 주었다. 
그 뒤에 불에 달군 쇠를 가져 와서, 효양의 몸 구석구석에 있는 힘줄들을 뜨겁게 지졌다. 
이것은 앞으로는 함부로 반항하지 말고 도망치지 말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유효손은 더이상 달아나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로 송곳으로 효양의 발 뒤꿈치에 구멍을 뚫어 버린 뒤에, 
거기에 끈을 꿰어 효양을 묶어 놓았다. 


이 사건은 효양의 숙부인 마미치(馬未致)가 삼사에 고발함에 따라 조정에 알려졌다. 
조정의 처벌은 유효손의 집안에 있는 모든 효양의 가족들을 유효손으로 부터 빼앗는 것이었으며, 
더이상 종이 아닌 신분으로 고치는 것이었다. 
자신이 종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된 효양은 유효손이 붙잡혀서 고문 받으며 
조사 받는 곳에 직접 기어나와서는 유효손의 얼굴을 보고 강간범이라고계속 해서 욕을 했고, 
 유효손은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다. 








5. 
1474년. 서울 동대문 밖 산에서 이상한 고기 덩어리 같은 것이 발견되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피투성이가 되어 온몸 구석구석을 뜨거운 쇳덩이로 지져댄 자국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산에 버려진지 한참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이 미약하게 나마 붙어 있었다. 
그 사람은 부유한 집안인 신자치(愼自治)의 여자 종으로 이름은 도리(道里)였다. 


사건의 진상은 이러했다. 신자치의 부인이었던 이씨(李氏)는 도리가 신자치와 동침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종 때문에 자신이 신자치에게서 멀어지고 있다고 생각한 이씨는 도리에게 격렬한 질투심과 분노를 느낀다. 
이씨는 자신의 친모와 함께 도리를 붙잡고 형벌을 가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도리의 머리카락을 모두 잘라버린 뒤에, 
도리에게 죄를 물으면서 수없이 구타하였다. 그리고 쇠를 달구어 우선 가슴과 성기를 지져버린 뒤에, 
몸 구석 구석 이곳저곳을 지지면서 고문하여 피부 곳곳이 온전한 곳이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동대문 밖의 산에 내던져 버린 것이다. 
그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도리는 엄청난 고통을 느끼며, 
자살 조차 할 수 없는 상태로 한참 동안 혼자 미약한 생명을 조금씩 이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발견되어 세상에 이 끔찍한 일을 알리게 된 것이었다. 


1427년 8월 20일. 거리에서 한 사나이가 알 수 없는 물건을 지고 가는 것이 발견 되었다. 
그것은 사람과 비슷한 형상이었으나, 
뼈와 가죽만 파리하게 붙은 처참한 모양이었다. 결국 그것은 덕금(德金)이라는 여자로 밝혀졌다. 
덕금은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로 재직하고 있는 권채(權採)의 종으로, 
권채와 그 일가족을 조사한 결과, 무서운 사실이 밝혀졌다. 


권채는 덕금을 사랑하여 첩으로 삼았는데, 권채의 아내 정씨(鄭氏)는 종인 덕금에게 강렬한 질투와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중, 덕금은 덕금의 할머니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할머니를 찾아 뵈러 집을 잠시 떠날 것을 청했다. 
하지만 평소에 덕금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던 정씨는 덕금이 그 할머니를 찾아가는 것을 허락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덕금은 병에 걸려 죽어가는 자신의 할머니 생각이 너무도 애틋하여, 허락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잠시 집을 떠나게 된다. 


덕금이 사라지자 권채는 덕금을 찾게 되었고, 정씨는 권채에게는 덕금이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나서 간통하러 간 것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그러자 권채는 격렬하게 질투하고 분노하게 되어, 덕금이 돌아오자마자 덕금의 머리카락을 잘라버리고 몽둥이로 덕금을 마구 구타하였다. 
권채는 덕금의 왼쪽 발에 족쇄를 채워서 외딴 방에 감금하였다. 이후, 권채 일가는 잔혹하고 변태적으로 덕금을 괴롭히게 된다. 


장씨는 덕금을 바로 칼로 베어 죽이려 했는데, 
또다른 여자종인 녹비(祿非)가 칼로 죽인 시신은 소문이 나기 쉽고 금새 누구인지 밝혀낼 수 있으니, 
서서히 고문하면서 병들고 굶어 죽도록 하자는 제안을 한다. 
장씨는 녹비의 제안을 받아 들여서 감금되어 있는 덕금을 그대로 굶어 죽이기로 한다. 
장씨는 덕금이 덕금 자신의 배설물과 함께 비참한 모습으로 족쇄를 차고 방에 갇혀 있는 모습을 보고, 
 굶주린 덕금에게 그 오물을 먹으라고 지시한다. 
덕금은 오물 사이의 구더기를 보고 질겁하여 격렬히 저항하였는데, 
그러자, 장씨는 덕금의 가랑이 사이에 바늘을 찔러 넣으면서 덕금을 괴롭혀서 결국 덕금이 구더기와 오물을 먹게 만든다. 
덕금은 그렇게 몇 달 동안이나 갇힌 채 매일 고문 받으면서 서서히 굶어 죽어 갔고, 마침내, 
비참한 몰골의 굶어 죽은 시체가 되었다고 보고 걸레처럼 버려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덕금은 발견되던 순간까지 죽지 않은 상태였다. 제정신과 온전한 몸을 유지하고 있지는 못했지만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부지해 살아 남아 있었던 것이다. 
 결국 조정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권채와 정씨, 그 밖에 권채 집안의 종들을 모두 조사했으며, 
권채의 아내인 정씨가 주범으로 모든 죄의 벌을 받게 된다. 


권채는 정씨에게 속았을 뿐이며, 
덕금의 잔인한 처벌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 지지를 얻어 권채는 이후에도 당당하게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실제로 권채는 유능한 학문적 재능을 보였으므로, 많은 저작을 남겼으며, 당시 조정에서도 그 실력을 인정 받고 있었다. 
몇 개월 동안 덕금에 대한 온갖 잔혹한 고문이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권채는 정말로 이러한 사실을 몰랐다기 보다는, 
태연자약하게 자신의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 교묘하게 처신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뛰어난 학식을 자랑한 고아한 양반이었던, 권채는 조선시대 최악으로 손꼽히는 감금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던 것이다. 
세상 이치가 허망하게도 권채가 남긴 저작 중에서 최고로 꼽히는 것은 
인간의 예절과 도리에 대해서 사례를 든 책인 "삼강행실도"의 서문을 쓴 것이다. 
덕금은 곧 사망했지만, 후에 권채가 쓴 "삼강행실도"는 우리나라 한문학의 걸작선을 모아 편집한 
"동문선"에까지 등재 되어서 지금까지도 널리 읽히고 있다. 


권채가 쓴 삼강행실도의 서문 본론 부분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임금과 어버이와 부부의 인륜에 대한 충, 효, 절의(節義)의 도리는 
바로 하늘이 내린 천성으로 모든 사람이 다 같이 갖고 있는 것이다. 
천지가 처음 생길 때부터 같이 생겼고 천지가 끝날 때까지 없어지지 않는 것이 바로 그 천성이다." 






6. 
조선시대에 사람을 저주하는 주술을 시도하는 것은 매우 큰 범죄로 취급되었다. 
따지고보면 한낱 허무맹랑한 헛수작에 지나지 않는것이지만, 
우선 원칙적으로 국론으로 배척하고 있는 미신을 믿는 것이라는 점에서 죄가 크게 취급 되었다. 
게다가 만약 성공하거나 실제로 저주가 위력을 발휘할 경우에는 전혀 원인을 알 수 없이 사람을 해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섭게 여겨졌다. 
가장 흔한 저주 방법은 죽은 동물의 시체나 뼈를 저주하고 싶은 사람의 곁에 놓아두는 것이었으며, 
그 방식은 주로 무당들이 개발하고 주선하였다. 
특히 사람의 뼈나 시체가 효과가 좋은 것으로 소개하는 무당들이 많았으므로, 
살인을 하거나 무덤을 파헤쳐서 은밀히 사람 시체를 구해주는 전문적인 업자들이 있기도 했다. 
이런 업자들 중에는 1730년 체포된 김이건(金二建) 같은 인물이 유명했다. 


저주와 관련된 사건들 중에는 장희빈등이 언급되는 궁중 내부의 저주 사건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가장 악명 높은 사건으로는 1730년 이만혁(李萬爀) 사건을 꼽을만하다. 


이만혁(李萬爀)은 당진(唐津) 현감(縣監)을 맡고 있는 자였으나, 
한 점쟁이가 주장하는 저주 이야기에 심취하게 된다. 
이만혁은 자신이 잘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장 강력한 방법으로 저주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저주를 위해 땅에 묻을 특수한 시체를 얻기로 결심하였다. 
점쟁이가 알려준 저주 방식을 위해서는 남자 한 사람과 여자 두 사람의 시체를 사용해야 했다. 
우선 이만혁은 종이었던 남자 한 사람과 여자 두 사람을 붙잡아 모두 죽을 때까지 구타하여 목숨을 잃게 만들었다. 
그리고, 저주를 하기 위해 제작된 쇠로된 조각을 세 구의 시체 입에다 끼워 넣었다. 
그리고 가시가 박힌 가시나무를 시체에 박아 넣어 시체 셋이 가시나무에 꽂힌 모양이 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시체를 다리 근처에다가 거꾸로 묻어 놓은 것이다. 


이만혁은 시체가 발견되면서 범행이 드러났고, 당진 일대 사람들이 끔찍하게 생각하여 수군거리게 되었다. 
당진의 많은 사람들이 겁에 질리게 되면서, 소문이 퍼졌고, 이만혁은 그 처벌로 자리에서 쫓겨났다. 












7. 
1500년대 후반부터, 조선에서는 점차 일종의 성병이 유행하게 된다. 
주로 음란한 생활을 했던 한량들 사이에서 성병이 퍼졌는데, 
그 증상이 매우 고통스럽고 특히 징그러운 피부병을 앓다고 죽게 되므로 매우 비참한 질병으로 생각 되었다. 
1560년대 중반부터, 바로 이 성병을 치료하는데, 
인간의 쓸개를 이용해 약을 만들면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허황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이것은 한 의원이 얼버무린 이야기가 발단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기록이 있다. 


처음에는 병에 걸린 사람이, 살인을 하는 전문 업자에게 돈을 주고 부탁하여, 
사람을 깊은 산속으로 붙잡아 와서 살아 있는 채로 나무에 묶어 놓은 뒤, 
칼로 사람의 배를 잘라서 쓸개를 빼내는 형태의 사건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후, 점차 범죄가 늘어나면서 주로 어린아이들이나, 
허약하면서 가족이 없는 노숙자들이 범행의 주요 대상이 되었고, 
나중에는 직업적으로 사람을 공격해서 쓸개를 빼내는 범죄자들이 생겨났다. 
결국 1607년에는 조정에 업자들이 이렇게 쓸개를 얻어서 
중국으로 밀반입해서 더 큰 돈을 벌기도 한다는 보고가 나올 지경에 이른다. 


1565년 무렵, 1576년 무렵, 1607년 무렵, 세 차례에 걸쳐 이러한 사건들은 대유행 하였다. 
서울의 종각 근처와 동활인서(東活人署), 
보제원(普濟院), 홍제원(弘濟院) 근처의 거리에는 당시 노숙자들이 많았다. 
 주로 너덜너덜한 누더기를 걸치고 바가지를 든채 음식을 구걸하면서 
연명하는 허약한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이 참혹한 범죄의 희생이 되어 소리 소문 없이 점차 붙잡혀 죽어갔고, 
결국에는 일대의 노숙자들이 모두 없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노숙자들이 모두 사라진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민가의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자행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범죄가 최고로 유행했을 때에는, 산골짜기에 나무에 묶인 채 배가 칼로 잘려서 내장을 드러내고 썩어 가고 있는 시체들이 
잇달아 발견되어서 나무꾼들이 나무를 하러 산에 들어가는 것을 꺼릴 지경에 이르렀다. 
사람들 중에는 농사하러 밭에 나가 있는 것 조차 혼자 있기를 무서워하게 되기도 하였고, 
항상 거리를 다닐 때에 공격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사람들이 서로 무리지어 다니게 되기까지 했다. 


1607년, 조정에서는 사건이 이처럼 심하게 퍼지도록 방치한 책임을 물어 포도대장을 파직시켰으며, 
감옥에 수감하였다. 
이후 이러한 사건이 이전처럼 심하게 유행한 적은 없었으나 비슷한 부류의 잔인한 살인사건은 가끔 발생하였으며 
심지어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범죄는 완전히 근절되지 못했다. 











8. 
고려시대 말부터 조선시대 초기에는 일본인 해적들이 피해를 입히는 일이 많았고, 
한편으로는 밀수를 위해 조선에 모여드는 일본인들도 잦았다. 
때문에 1500년대 초반에는 일본인이라면 일단은 해적이나 밀수꾼의 무리, 
혹은 이리저리 흘러들어와서 민폐를 끼치며 사는 무리 정도로 
보는 생각이 퍼져 있었다. 더우기 군인들로서는 일본 해적들과 싸우는 것이 실전에서 공을 세우는 
가장 흔한 기회 중에 하나였기 때문에, 
일본인을 멸시하고 학대하는 경우가 잦았다. 


당시 일본인들 중에는 조정의 허가를 받고 해변에 머물며 지내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는데, 
이들 때문에 조선 당국은 여러가지 골치아픈 문제를 많이 겪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이 일본인들은 부당하게 고통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단적인 예로 수사(水使)로 재직하고 있던 이종의(李宗義)는 바닷가에서 해산물을 채취하고 있던 일본인 10여명을 보고는, 
괜히 해안에 온 해적이라고 착각이라도 했는지, 이유 없이 마구잡이로 죽여 버린 일도 있었다. 


이중에 가장 악명 높은 사람으로는 부산포 첨사로 재직하고 있던 이우증(李友曾)을 꼽을 수 있다. 
군인이었던 이우증은 일본인들을 여러가지로 괴롭히는 것을 일종의 놀이로 여기며 즐기곤 했는데, 
그중에서 활쏘기 놀이가 널리 회자 되었다. 


이우증은 일본인을 붙잡은 뒤에 머리카락에 노끈을 묶고는 그 끈 끝트머리를 집의 천장에 그대로 매달아 놓았다. 
그러면 매달린 사람은 머리카락이 아파서 매달린 채로 팔다리를 버둥거리게 되는데, 
이우증은 그 모습을 보면서 그 사람으로 부터 한참 떨어져서 
서서는 갑자기 자신의 활솜씨를 자랑하겠다고 활을 빼든다. 

리고, 이우증은 화살을 쏘아서 일본인을 매달아 놓은 끈을 맞추겠다고 하는데, 
그러면 매달린 일본인은 화살을 잘못 맞을 까봐 크게 겁을 먹고 소리를 지른다. 
그러다가 화살을 맞춰서 끈이 끊어지면 일본인이 바닥에 떨어져 나동그라지게 되고, 
그러면 이우증은 그 모습을 보며 유쾌하게 즐거워하며 자신의 활솜씨를 뽐냈다. 


이우증이 일본인을 천장에 매달아 놓고 그 끈을 활쏘기하면서 노는 것은 
당시에 절도사로 재직하고 있던 유계종(柳繼宗)도 목격하게 되었다. 
그런데 유계종은 그 모습을 보고 매우 즐거워 하면서 크게 칭찬하였고, 
덕분에 이우증이 매달아 놓은 일본인에게 활을 쏘면서 괴롭히는 행동이 크게 유행해서 
일본인들이 머무는 곳 근처에 있는 조선군 부대 각지에 
이렇게 일본인을 괴롭히는 것을 따라하게 된다. 


얼마후, 조선에 거주하던 부산 일대의 일본인들이 대마도주 휘하 세력의 지원을 얻어 
폭동을 일으키게 된다. 바로 역사에서 말하는 삼포왜란인데, 
이우증은 바로 전날까지도 일본인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묵살했고, 
도리어 화를 내며 보고한 사람를 문책하였다. 
이우증은 뒤늦게 일본인들이 급습해 오자 황급히 도망친다. 그러나 결국 풀섶에 
숨어서 떨고 있던 이우증은 일본인들에게 발견되었고, 
여러 일본인들에게 마구 난도질 당하여 죽게 된다. 


폭동이 일어나자 일대의 조선군들은 겁을 먹고 대부분 도망치거나 후퇴해 버려서, 
일본인들은 부산 일대의 마을들을 장악한다. 
일본인들은 마을의 식량과 재물을 약탈하여 매일밤 술판을 벌이며 놀기 시작했다. 
이때 불탄 조선의 민가가 1천채에 가까웠는데, 
공식 기록에는 796호가 불에 탔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퇴한 조선군은 반격하지 않고 숨어 있으면서 조정에 계속 지원군을 보내줄 것만을 요청했다. 
조정에서는 마땅히 대처할 방법을 찾아내지 못해서, 
폭동을 일으킨 일본인들의 관련 세력과 어떻게 화친을 맺어보자는 다소 얼토당토 않은 논의까지 진행되기도 했다. 


마침내 조선군에서는 유담년을 지원군을 이끄는 장군으로 삼아 부산 방향으로 지원군을 보낸다. 
유담년은 지나치게 잔인한 일을 많이 저지른 부패한 군인으로, 
그 죄로 자리에서 쫓겨나 집에서 놀고 있었다. 
유담년은 다시 장군이 되어 군사를 이끌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팔뚝을 걷어 붙이며 
"나는 가뭄이 들었을 때의 나막신과 같아서, 아무 쓸모 없이 여기다가, 
장마가 졌을 때가 되면 그제서야 쓰일 뿐이다"라고 비아냥 거리면서 소리 질렀다. 
당시 조선 군인들은 대낮에 괜히 약탈을 하는가 하면, 
서울 시내의 폭력배와 범죄자들이 약탈을 하기 위해 군인들 사이에 끼어들어 같이 약탈을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조선군은 일본인들을 전멸시키는데 성공하여, 일본인들의 시체가 여기저기에 끝없이 널브러져 있게 된다. 
이때 가장 악명을 떨친 사람은 소기파(蘇起坡)라는 군인이었다. 
소기파는 재물이나 승진에는 큰 관심이 없으며 묵묵히 임무를 수행하면서 오직 전투에만 전념하는 사람이었다. 
소기파는 이미 북방의 여진족들과도 전투 경험이 많은 사람이었고, 
아마도 전쟁터에서 사람과 싸우고 사람을 죽이는데, 기괴한 취미를 갖게 된 듯 보인다. 


소기파는 당시 죽은 일본인 시체들 사이를 뒤지고 다니며 혹시 살아 있는 사람이 없는지 찾아 다녔다. 
만약 시체들 사이에 살아 있는 사람이 있으면 소기파는 자신의 칼을 뽑아서 그 사람의 배를 갈라버렸다. 
그리고 얼굴과 손에 그 피를 묻혀 바르며 즐거워 했고, 
그 자리에서 술병에서 술을 따라마시면서 그 사람의 내장을 그대로 꺼내어 씹어먹으며 안주로 삼았다. 
주변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매우 끔찍하게 여겨서, 소기파를 불교에서 말하는 지옥의 마귀인 야차와 같다고 하여, 
소야차(蘇夜叉)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이 사건은 295명의 일본인의 목을 잘라서 일본인들이 드나드는 곳에 높다란 무덤으로 쌓아 놓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삼포왜란 당시의 초라한 후퇴와 문제가 많은 전투들에 대해서는 책임 문책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당시에 이르렀던 졸렬한 화친 논의에 대해서도 뒤에 비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저 덮어 놓고 잊고 넘어가기에 급급했다. 


그러면서도 일본인들에 대한 반발심과 적개심만 더욱더 극심해졌는데, 
그러다보니 어이 없는 일들이 자주 벌어졌다. 
1545년 전라도 흥양(興陽)에서는 중국배 세 척이 표류하여 해변에 도착한다. 
당시 현감으로 재직하고 있던 소연(蘇連)은 이 배에 탄 중국인들이 일본인 
해적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인근 부대에 연락하여 일대의 모든 군병력을 
동원하여 공격하기 시작했다. 
중국인들은 자신들은 일본인도 아니고 일본인 해적은 더더욱 아니었으므로, 
울부짖으며 도망치면서 산속으로 숨었는데, 
조선군은 끝까지 이들을 추적하여 표류한 중국인 108명을 학살해 버렸다. 


조정에서는 표류한 중국인들을 잘못 죽인 것을 나중에 알고, 이 사실이 중국에 알려지지 않도록 고민해야 했고, 
괜히 학살당한 중국인들의 넋을 위로하는 제사를 성대하게 치러주는 따위의 일을 벌였다. 


당시 역사를 편찬하던 기록을 보면 삼포왜란을 기점으로 일본인들이 
조선을 무시하고 가소롭게 보기 시작한 것으로 볼만하다는 평이 있다. 











9. 

조선시대 전체에 걸쳐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굶주리며 비참한 일들을 겪은 기록 중에 가장 풍부한 내용을 갖고 있는 것은 
1670년과 1671년, 2년간 이어진 대기근이었다. 이 2년 동안 각종 자연재해로 농산물이 매우 부족해지고 전염병마저 유행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굶어죽는 참사가 일어났다. 


1671년 1월 무렵의 겨울이 그 피해가 최악에 달한 시기였는데, 
굶주려 낯빛이 누런 백성들이 관청에서 나눠주는 죽을 얻어 먹으려고 
나와 있다가 창고가 텅텅비어 죽을 못 먹게 되자 멍하니 지켜보고 있다가 죽는 일들이 속출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켜 서로 도둑질을 하는 일들이 많았고, 
집에 조금이라도 양식이 있으면 곧 약탈을 당하곤 했다. 


거리 곳곳에 죽은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었는데, 관청에서는 시체를 수레에 수북하게 쌓아서 계속 운반해야 했다. 
쌓여 있는 시체들 중에는 아직까지 숨이 붙어 있는 사람들도 간혹 있었는데, 
시체 속에 묻힌채로 그렇게 실려가다가 서서히 죽어갔다. 
시체의 발에 줄을 묶어서 질질 끌고 가서 묻기도 했는데, 
굶어죽기 직전의 사람들이 미리 발에 줄을 묶어 놓은 채로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으면서 
죽기를 기다리는 비참한 광경이 도처에서 펼쳐졌다. 1671년 1월 11일 전라도 감사로 재직하고 있던 오시수(吳始壽)는 
"전 지역에서 갓난 아이를 기르기를 포기하고 강물과 개천에 내던져버리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고 보고 하기도 했다. 


추위가 심했으므로, 옷을 벗겨 훔쳐가는 강도들도 많아졌다. 
굶어서 걸인이 된 사람들은 귀신과 같은 몰골로 맨몸에 짚푸라기를 엮은 것을 배와 등에 두르고 추위에 버티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시체에 입혀 놓은 수의를 벗겨가기 위해 산에서 무덤을 파헤쳐서 썩은 시체에서 옷을 벗겨가는 일도 많았다. 
여기 저기에 굶어 죽고 얼어 죽은 시체가 많았으므로 빈민을 구체하는 진휼청에서는 시체를 흰 천으로 싸서 땅에 묻게 하였는데,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사람들은 이것을 파헤쳐서 시체를 싼 천 조각을 훔쳐갔다. 


1671년의 기근을 일컬어 노인들은 생전에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것으로 평가했고, 
임진왜란을 겪은 생존자들은 이 기근이 전쟁보다도 더욱 참혹한 상황이라고 말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 기근을 버텨내기 위해 조선의 모든 빈민 구제 제도들과 관계 관청들이 모두 동원되었으며, 
역사적으로는 당시 조선의 정치와 경제 상황의 많은 사항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1671년의 대기근을 지내는 동안 한 가족이 모두 굶어 죽은 집은 물론이요, 
한 마을 사람들이 모두 굶고 병들어 죽어 버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하였다. 
당시 서울에서는 사람이 죽었을 때 정식으로 무덤을 만들만한 사정이 되지 못해서 성벽 아래에 대충 시체를 파묻곤 했는데, 
약 100년 후인 1753년, 지평으로 일하고 있던 이상윤(李尙允)은 동대문 일대의 성벽을 수리하는 공사 과정에서 성벽 아래에서 
수천명 분량의 사람 뼈들이 발견된 것을 알고 경악하여 조정에 보고하는 일도 있었다. 


1671년의 기근은 조정에서 가장 큰 문제로 논의된 일이었으므로, 정치 파벌간의 싸움에서 중요한 소재로 악용되기도 하였다. 
그 와중에 지방 관청에서는 자신의 구역에는 주민들을 잘 구제하여 평화롭다는 것을 상부에 내세우면서 자신의 자랑을 하고 싶어했다. 
때문에 일부 지방 관청은 비참하게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상황을 일부러 숨겨서 조정에 구호물자를 요청하는 일을 자발적으로 피하는 일도 있었다. 
이렇게 주민들의 구제에 공을 세웠다는 표창을 받기 위해 몰래 사망자가 없는 것으로 조작하고 포상을 떼어먹는 관원들이 지적당하기도 하였다. 











10. 
조선시대에 정식으로 조정에서 논의된 사건 중에 가장 수수께끼 같은 사건을 꼽는다면 
1530년대를 무렵에 일어난 어린이에 대한 살인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1531년 남대문에서 문안에서는 이상한 자루가 내던져진 채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자루를 열어보니 안에는 10살이 조금 넘은 여자아이가 목이 잘려서 자루속에 담겨 있었다. 


발견된 여자아이의 머리를 보면 귀고리를 한 모습이었다. 조정에서는 이 사건을 반드시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과시했다. 
하지만 한성부 판윤 윤은보는 시체를 검사해 본 결과 살인하여 죽은 시체인 것 같지는 않다는 의견을 내세우면서 
그냥 땅에 묻어 버릴까 말까 망설이면서 시간을 보냈고, 그러는 사이에 사건은 영원히 잊혀져 버렸다. 


1533년 2월 17일. 감사로 재직하고 있던 김귀성(金貴成)의 집이자 무당의 집 뒤의 거리에 
5~6세된 여자 어린아이 한 명이 버려진 채 발견되었다. 
놀라운 것은 이 아이가 발이 잘린 상태였다는 것이다. 아이를 발견한 김귀성은 황급히 아이를 구조하여 관청에 보고했는데, 
어린아이는 말을 할 수 있었으므로, 자신의 이름은 "개춘(開春)"이라고 했고, 
자신의 오빠가 있는데 그 이름이 "어리가이(於里加伊)"라고 했다. 
아이에게 발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물었더니, 그저 "칼로 내 발을 잘라내면서, 
죽어라, 죽어라고 했어요"하고 대답했다. 


조사를 진행하자 한덕(漢德)이라는 종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한덕은 자신의 주인 집에 가다가 하반신에 동상이 걸린 아이를 발견했는데, 
아이가 불쌍해 보이고 마침 자신에게 아이가 없기에 데려가서 보살폈다고 했다. 
그러나 한덕의 주인이 더러운 아이를 집안에 들여 놓을 수 없으므로 
쫓아내라고 하기에 다시 거리에 버렸다는 것이다. 한덕이 이후의 소식을 들어보니, 
그 이웃 중에 궁궐 출신의 어느 집에서 데려갔다가 다시 버렸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그 후에는 김별좌(金別坐)의 종인 연수(連守)가 다시 데려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덧붙였다. 
 한덕은 아이가 발이 잘린 이유는 모른다고 말했다. 


한편 조사 중에 중덕(仲德)이라는 종이 또다른 주장을 펼쳤다. 발견된 아이는 옥가이(玉加伊)라는 아이로, 
바로 자신의 딸이라는 것이었다. 
중덕은 지난해 9월 29일에 아이를 잃어버렸는데, 5 
개월 만에 문득 알 수 없는 아이가 발이 잘린 채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본 즉, 
바로 자신의 딸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이 아이는 조사 과정에서 처음으로 아이와 관련된 것으로 밝혀졌던 한덕이 곁에서 보살펴 주고 있었다 
. 사건의 조사를 담당하던 한성부에서는 
다시 한 번 아이에게 직접 도대체 누가 발을 자르며 죽이려 했는지 물었다. 그때 한덕이 아이에게 죽을 먹여주고 있었는데, 
아이는 죽을 먹다 말고 죽을 먹여주고 있는 한덕을 바로 가리키면서, "이 여자가 내 발을 잘랐어요"하고 말했다. 
아이는 자신이 발을 잘릴 때 털모자를 쓴 사람을 보았다는 말을 했으므로, 한성부에서는 아이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많은 사람들을 
각기 털모자를 씌운 모습으로 아이에게 보여주면서 그 때 본 사람이 있는지 찾아보라고 했으나, 아이는 여기에는 실패했다. 


이후 의금부의 담당자들이었던 유보(柳溥)와 심언경(沈彦慶)이 직접 사건에 대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아이에게 무엇으로 발을 잘렸는지 물었고, 아이는 "칼이요." 하고 답했다. 
두 사람이 어디서 발을 잘렸는지 묻자 아이는 
"방 안에서" 라고 답했다. 언제 발을 잘렸는지 묻자 아이는 "낮에"라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아이 앞에 한덕과 중덕 두 사람을 동시에 데려와서 누가 발을 잘랐는지 물었는데, 
그러자 아이는 한덕을 가리키며 "이 사람이에요"하고 답했다. 아이는 "두 손을 묶고, 
입을 솜으로 틀어막고 내 발을 잘랐어요"라고 답했다. 


아이의 발을 자른 범인은 한덕으로 굳어지는 듯 했으나, 사람들 간에 몇가지 석연찮게 말이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고, 
무당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점이라든가, 아이가 동상에 걸려 있어서 발이 썩어서 떨어져 나갔을 가능성이라든가 하는 점들이 
의심스러운 점으로 제시되기도 했다. 조정에서는 최고의 의원들에게 아이의 발이 잘린 자리를 관찰하게 하여 썩어서 발이 떨어져 나간 것인지 
잘려 나간 것인지 조사하게 하기도 했으나, 어린아이의 말만으로는 큰 죄를 속단할 수 있는 증거로는 부족하다는 쪽으로 맺어졌다. 
결국 이 사건은 아이의 말이 나이에 맞지 않게 일관되어 있고 정리정돈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영원히 묻혀 지게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어린아이를 잃어버리거나, 어린아이를 납치하여 산 속에서 몰래 살인해버리거나, 
어린아이를 납치한 뒤에 몰래 종으로 삼아 노비로 기르는 사건들이 계속해서 나타난다는 점이 문제거리로 중요하게 언급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상한 사건들을 이후에도 벌어졌다. 
1546년에는 아직 어린 여자와 두 세살 바기 아기의 시체가 서울 거리에 굴러다니는 것이 발견되었다. 
시체는 온몸 이곳저곳이 불로 지진 참혹한 상태였고, 특히 아랫배와 배꼽 주위를 마구 지져 놓은 모양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시체를 발견한 집에서 다른 곳으로 몰래 시체를 옮겨 놓았다는 정도가 
더 조사되었을 뿐, 이후에도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Posted by MAESTRO7